문재인 대통령이 22일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전략’을 발표한 지 얼마 뒤 이런 말이 나왔다. 대통령이 나서 정부 연구개발비를 연 4조 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100만 명 규모의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업계에 큰 호재인 듯했다. 하지만 관련 회사들의 주가는 오히려 하락했다. 한 공무원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심지어 현 정부 출범을 앞두고 발표된 현실성 떨어지는 공약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라며 말을 흐렸다.
한국의 공공 보건의료 빅데이터는 규모 면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 수준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하고 있는 보건·의료 데이터만 해도 6조 건이 넘는다. 하지만 각종 규제로 인해 이 같은 의료 빅데이터의 활용은 꽉 막혀 있다. 질병 예방을 위한 유전자 검사만 해도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은 전면 또는 폭넓게 허용되고 있지만 한국은 의료계의 반대에 막혀 시범사업 시행만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최근 몇 개 정부를 거치면서 ‘규제혁신’ 없는 바이오산업 발전 전략은 희망고문에 가까운 공약(空約)에 불과하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전 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상을 왜 지금 내놓는지, 누가 주도한 작품인지 명쾌한 설명이 없다. 하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논란도 비슷하다. 정치권 주변에서 말하는 ‘문재인 정부의 미스터리’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 것 아닌가 싶다.
예전엔 이런 문제가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기획재정부가, 산업정책은 산업통상자원부가, 보건정책은 보건복지부가 했다. 해당 부처 장관이 정책의 주체로 명확히 드러났다. 잘했으면 칭찬을 받고, 실패하면 책임을 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장관들은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듯하다. 대통령정책실장이 ‘관료들이 말을 안 들어서 일이 안 된다’고 푸념하고 맞장구치는 것을 보면 청와대 참모들이 정책의 수립과 수행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간다.
문 대통령은 2일 “과거 어느 정부보다 야당 대표들을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참모진의 보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역시 논란만 키웠다. 발언 시점(재임 722일)까지 문 대통령은 30번에 걸쳐 야당 대표들을 만났다. 평균 24일에 한 번꼴이다. 전체 재임 기간 야당 대표들을 36번 만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잦은 횟수다. 하지만 이는 국가적 행사를 포함해 문 대통령과 야당 대표들이 ‘한자리’에 있었던 경우를 모두 더한 것이다. 현안 논의를 위해 야당 대표들과 만난 여야 회동만 세어 보면 문 대통령의 ‘소통’은 9번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박 전 대통령 4번, 이명박 전 대통령 9번, 노무현 전 대통령 13번이다. ‘과거 어느 정부보다…’라고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일이 잦아지면 불신의 화살은 대통령을 직접 향하게 된다. 총체적 평가는 대통령이 받겠지만, 이쯤 되면 수석이든 비서관이든 자기 보고나 정책에 ‘이름표’를 달고 책임을 져야 한다. ‘청와대 정부’라는 비판을 피할 생각이 없다면, 참모들에게도 정책실명제를 적용할 때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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