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공장을 새로 짓거나 본사를 이전할 때 요즘 가장 우선시하는 게 인재 확보의 용이성이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아마존이 제2본사를 선정하겠다며 북미권 도시 238곳을 경쟁시켰다가 뉴욕을 선택한 주된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이었다. 뉴욕은 컬럼비아대, 뉴욕대(NYU),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등을 졸업한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도시다. 20억 달러의 세금 혜택과 40년간 금지해온 고층빌딩 헬기장 허용 같은 파격적 혜택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SK하이닉스가 올해 초 120조 원 규모를 투자할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로 경기 용인시를 고집한 이유도 인재 확보 때문이었다. SK는 지방 균형 발전을 중시하는 현 정부의 기조를 잘 알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기술 연구개발(R&D)이 가장 중요한데 수도권을 벗어나면 인재가 떠난다”고 읍소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전쟁은 필사적이다. 과거엔 한 산업의 오랜 강자를 뛰어넘으려면 똑같이 좋은 제품을 싸게 생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 베트남처럼 생산 비용이 싼 곳이 제조업 최적의 입지였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바뀐 세상에선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전통 제조업의 강자를 누를 수 있게 됐다.
자동차 산업을 보라. 10년 전만 해도 BMW, 벤츠의 최대 경쟁자가 테슬라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더구나 앞으로는 기술의 변화만 아니라 공유경제 같은 비즈니스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도 더 거세질 것이다.
그러니 아이디어(R&D)-생산-고객(CR)으로 이어지는 공급사슬(supply chain)에서 그동안은 생산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아이디어와 고객에게 중점을 둬야 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 스마트한 고객이 끝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기업 입지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미국처럼 여러 주들의 연합이 한 국가가 된 곳은 주마다 인재와 스마트한 고객을 확보한 도시들이 많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그런 도시가 아직까지 서울밖에 없다. 서울은 총인구 5100만 명 중 20%에 가까운 980만 명이 살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무엇보다 좋은 대학이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걸 직장을 고를 때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망 전자기업 3곳에 모두 합격했으나 ‘서울 근무’라는 조건 하나로 건설사에 입사한 30대 공대 졸업생의 사례도 있다.
현대중공업이 지난주 금요일 주주총회를 열어 중간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과 사업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회사를 나누고 한국조선해양을 서울에 두는 결정을 내렸다. 회사는 “싼 생산비용을 앞세운 중국이 턱밑까지 쫓아왔기 때문에 R&D로 기술력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투명하다. 좋은 인재를 확보하려면 R&D를 담당할 한국조선해양 본사를 서울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조는 인력 감축이 이뤄질 수 있다며 물적 분할 반대 투쟁을 강력히 벌이고 있다. 앞으로 주총 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총파업도 벌일 예정이다. 울산시장도 삭발 투쟁까지 하고 나섰다. 회사를 뗐다 붙였다 하는 과정에서 인력 조정이 일어날 수 있고, 근로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노조의 불안감이 영 근거 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조선업계는 과거의 ‘하면 된다’ 정신만으론 살아남기 힘들다. 생존하려면 기술력 확보가 필수이고, 그러자면 뛰어난 연구 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회사는 당장 인력 조정을 않겠다고 약속했다. 눈앞의 일자리만 지키려다 회사가 망가질 경우 큰 보금자리를 잃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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