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섯이랑 신선한 크림을 잔뜩 넣어서 조린 송아지 갈빗살, 이건 큰누나가 제일 잘해. 훈제한 돼지 넓적다리 푹 삶은 것에 여름감자튀김, 포도나무에 구운 어린 양고기에 해콩 삶은 것도 괜찮지. 작은누나가 한 쿠스쿠스는 또 어떻고. 모로코 사람보다 매운 소스를 더 잘해. 디저트는 슈납스 독주를 넣어 반죽한 케이크, 한가운데 생크림이랑 산딸기가 가득 있으면 좋겠어. 살구파이, 체리파이도 너무 먹고 싶다! 중요한 건 슈납스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여름 과일 케이크는 엄마가 제일 잘했어. 여름 내내 엄마 손에는 풀즙, 과일즙이 잔뜩 배고 슈납스 냄새가 은은하게 났었는데….”
프랑스에 가면 제일 먼저 뭐가 먹고 싶으냐고 하나만 말해 보라고 했더니 줄줄이 메뉴가 흘러나온다. 아, 그만! 결국 내가 그의 입을 막고 만다. 레돔은 음식 투정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에 살면서 아침은 프랑스식으로 간단히 먹는다. 점심은 양조장 주변 식당에서 먹는다. 순댓국밥, 곤드레밥, 청국장, 황태해장국, 동태찌개, 보리밥, 수제비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지 먹는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순댓국밥에 밥을 말아 먹는다.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간혹 젓가락에서 빠져나온 깍두기가 떨어지면서 옷에 붉은 물이 튄다. 고춧물이 든 셔츠를 보면 괜히 안쓰럽다. 부드러운 곱슬머리에서 청국장 냄새가 솔솔 나면 왠지 시어머니 생각이 난다. 막내아들을 얼마나 금지옥엽 키웠던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구만리 떨어진 곳에서 뚝배기 청국장으로 배를 채운 뒤 밭으로 가는 것을 본다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녁은 되도록 프랑스 요리를 한다. 다진 돼지고기를 삶은 양배추로 감아 토마토를 다져 넣어서 푹 찌는 종류의 무쇠 솥 요리를 주로 한다. 밥 대신 프랑스 면을 삶아서 곁들여 준다. 오른손으로 칼을 들고 왼손으로 포크를 쥘 때 그의 표정은 젓가락으로 밥 먹을 때와는 다르다. 음식 먹는 속도가 빠르고 활기차다.
나도 프랑스에 사는 동안 그랬다. 고기를 칼로 자르면서 포크로 찍어 먹어야 하는 양손 사용이 어색했다. 먹는 것에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젓가락을 쥐었을 때만이 미각이 살아났고 자유롭고 먹는 것이 행복했다. 스테이크도 내 몫은 먼저 자른 뒤 느긋하게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베란다 작은 화분에 고추와 깻잎을 심어놓고 애지중지 바라보며 끼니마다 한 잎씩 따서 먹었다.
이제는 반대가 됐다. 레돔은 텃밭에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 나라 식물들을 잔뜩 심었다. 수제비 점심을 먹고 온 뒤 커피를 한 잔 들고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른다. 이것저것을 보고 만지고 다독인다. ‘이거 잡초다. 당장 뽑아버려야 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는 얼굴을 붉히며 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화를 낸다.
“올해는 뤼바르브가 너무 잘되었어. 나 어릴 땐 이걸 생으로 많이 먹었어. 껍질을 벗겨 설탕에 찍어서 먹었는데 정말 특이한 맛이야. 식물 줄기를 먹는데 레몬과 오렌지를 먹는 기분이 든다니까. 자, 이거 한 번 먹어 봐.”
그가 뤼바르브를 꺾어 껍질 벗긴 줄기를 내민다. 한 입 먹으니 내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진다. 새콤하면서도 쓰고 떫은 이 맛은 시어머니의 여름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뤼바르브를 한 아름 꺾어 부엌 식탁에 부려놓은 뒤 껍질을 벗기면 온 집안에 뤼바르브의 새콤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가득 퍼졌다. ‘오늘 저녁엔 뤼바르브 파이를 먹을 수 있겠다! 아들이 이렇게 말하면 시어머니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만 나는 파이보다는 잼 쪽을 더 선호한다.
“파이는 한 판 구우면 하루 만에 다 먹어버리잖아. 우리는 잼을 만들어 오래오래 먹자.”
이렇게 말하고 나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 한없이 감성적이었는데 그 아내란 여자는 매사 너무 실용적이다. 두 번째 뤼바르브 수확 때는 파이를 해야겠다. 이 여름 동안만이라도 어머니의 맛,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줘야 할 것 같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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