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의 미술시간]〈63〉붉은 베일의 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13일 03시 00분


장자크 에네르, ‘성 파비올라’ (복제화),1885년.
장자크 에네르, ‘성 파비올라’ (복제화),1885년.
붉은 베일을 쓴 여인의 초상화다. 한때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아트숍에서 가장 잘 팔리는 그림엽서 중 하나였다. 옆모습으로 그려졌지만 또렷하면서도 선한 눈빛과 꼭 다문 입술은 이 젊은 여인에게서 기품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누구의 초상화일까?

그림 속 여성의 이름은 파비올라. 나쁜 남자와 결혼한 로마 귀족이었다. 그는 남편의 방탕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한 후,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요즘이면 지지받을 결정이겠지만 그는 4세기 사람이다. 이혼과 재혼은 교회법을 어기는 것이라 사회적 비난을 받았고, 교회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 남편이 죽은 뒤엔 그동안 누리던 세속적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전 재산을 털어 로마에 첫 기독교병원을 세웠고, 거지나 행려병자 같은 소외된 환자들을 받아 직접 간호했다. 순례자들을 위한 안식처 설립과 열정적인 자선활동으로 시민들의 존경과 교회의 인정을 받아 결국 가톨릭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완전히 잊힌 성인이었다.

그가 대중적으로 부활한 건, 1854년 영국인 추기경이 쓴 소설 ‘파비올라’ 덕분이었다. 약 30년 후 프랑스 화가 장자크 에네르는 초상화를 그려 파비올라의 이미지를 널리 각인시켰다. 그림 속 붉은 베일은 속죄와 희생, 그리고 불꽃같았던 성인의 열정과 헌신을 상징한다. 원작은 1912년경 분실돼 사라졌는데도 이 초상화는 세계 도처의 무명 화가들에 의해 지금도 꾸준히 복제되고 있다.

영리한 현대미술가 프랑시스 알리스는 직접 그리는 대신 이 복제품들을 모아 설치미술을 만들었다. 1994년부터 각국 벼룩시장이나 골동품상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모작은 현재 500점이 넘는다. 파비올라의 초상이 계속 사랑받고 그려지는 건, 그가 역경을 이겨내고 주체적으로 산 여성의 아이콘이자 시대를 초월한 이타적인 삶의 표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장자크 에네르#성 파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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