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난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이 끝나면 항상 근처 놀이터에서 1시간 정도 놀았다. 그날도 아이는 엄마랑 어린이집이 끝나고 놀이터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엄마가 좀 늦었다. 어린이집 교사는 엄마가 오실 때까지 그림책을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아이는 빨리 놀이터에 갈 생각에 작은 거짓말을 생각해냈다. “아 참 선생님, 엄마가 오늘은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교사는 “그래? 잠깐만 엄마한테 확인해 볼게”라고 말하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아이는 그 사이 몰래 어린이집을 빠져나와 혼자 놀이터로 갔다. 이상하게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갑자기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웠다. 아이는 그네도 타보고 모래놀이도 하는데, 한 무리의 형들이 놀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보기에는 엄청 큰 형들이었다. 형들은 자기들끼리 낄낄대더니, 혼자 있는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는 순간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곧 번쩍 들어 올려졌고 다시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달려왔고, 울부짖으면서 아이를 안았다. 경찰이 왔고 119가 왔다. 아이는 병원에 도착해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치료도 받았다.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랬다. 그러나 아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아이의 트라우마가 치료가 될 수 있을지 물었다. 아, 아이는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큰일은 간단하게 “네, 좋아집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런 충격은 평생 가져간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충격이 오래가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던 충격은 오래간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체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욕구가 있다. 아이는 그 힘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너진 힘을 다시 길러줄 수 있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치료를 받으면서 다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돼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어떤 느낌들을 다시 찾아주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형사나 검사가 돼 나쁜 사람들을 처벌하는 일을 함으로써 그 충격을 승화시켜 나가기도 한다.
그 기억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생각날 수도 있고, 어쩌다 꿈에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있었던 일을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다. 우리 내면을 ‘집’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다만 그 기억이 거실이나 안방을 차지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면서, 약간 골방으로 밀어 넣은 그 기억을 가끔씩 들여다보면서 잘 달래기는 해야 한다.
그런 충격을 치료할 때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섣불리 “잘 이겨내고 있다” “참 대단하다.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칭찬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잘 이겨낼 만한 일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잘 이겨내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아이에게 서둘러 칭찬하면 더 부담이 된다. 어떤 착한 아이들은 어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힘들다는 말, 무섭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게 되면 아이 안에는 더 큰 공포가 자리 잡는다. 충격을 치유해 가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이 아이가 정말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 순간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견딜 수가 없는 거다. 이럴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이 좋다.
“네가 겪은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야. 힘든 일은 고통스럽고 무서워. 그냥 좀 겪어야 돼. 무서워해도 돼. 그럴 만한 일이었어. 그냥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고, 또 그 형아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무섭다고 어른들에게 말해. 괜찮아. 그래도 돼. 네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한 거거든.”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정말 그래도 돼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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