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형사립고(자사고) 한 곳이 문을 닫는다면 그 학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일반고들도 난감한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의 한 자사고 교장이 교육당국의 자사고 폐지 이후 상황을 우려하면서 한 말이다. 일반고를 살린다며 자사고를 재지정 평가에서 탈락시킬 경우 오히려 그 부정적 여파가 일반고에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사고는 전국이나 광역 단위 지원자를 대상으로 선발하는 입시 특성상 멀리 있는 다른 지역의 학생들이 다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된다면 기존 자사고가 그 주변의 근거리 배정권역에 들어간다. 그 지역에서 학생을 균등하게 배정받는 학교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저출산과 도심 공동화로 학생 수가 급감하고 있는 서울 강북 도심의 고교들은 학생 모집이 더 어렵게 될 수 있다. 일반고 정상화를 위한다는 자사고 폐지가 일반고를 더 위축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 것이다. 서울 강북 도심의 일반고들은 이미 중학생이 부족해 학생 모집에 애를 먹고 있다. 일부 자사고는 만약 일반고로 전환된다면 존속을 위해 학생 충원이 가능한 곳으로 학교를 이전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에는 22곳의 자사고가 있고, 올해 13곳이 재지정 평가 대상이다. 전국에는 자사고가 42곳 있다.
지방에서는 상산고가 있는 전북 전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전국에서 재지정 평가를 받고 있는 자사고 24곳 중 첫 번째로 상산고의 평가 결과가 20일 나오기 때문이다. 상산고는 ‘수학의 정석’ 저자인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이 1981년 세운 학교로, 2003년 자사고로 전환했다. 설립 직후부터 지역 명문고로 손꼽혔지만 자사고 전환 이후 전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어 급성장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자사고 폐지 정책이 추진되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전북도교육청은 전국 시도교육청 가운데 유일하게 재지정 커트라인을 80점으로 다른 교육청보다 10점 더 높였다. 이에 상산고 학생과 학부모, 지역 주민, 전북 지역 국회의원 등은 “지역의 명문고가 사라져선 안 된다”며 상산고의 자사고 유지를 촉구해왔다.
자사고는 고교평준화로 인한 획일적 교육을 바로잡고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다양화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처음 도입됐다. 교육과정 결정이나 수업 일수 조정, 학생 선발 등에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되 정부 지원 없이 등록금과 재단 전입금으로 운영된다. 자사고는 설립 이후 약 20년간 지역 명문고로서의 입지를 다지면서 성장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입시학원으로 변질돼 고교 간 서열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자사고 측은 이 주장을 정면 반박한다. 자사고 2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일반고보다 등록금이 3배 비싸지만 사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아 무척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사고 1학년 자녀가 있는 다른 학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이나 특강을 들으며 공부와 취미 생활에 열중한다”고 전했다. 자사고 폐지의 근거로 거론되는 입시학원화 주장과 배치되는 다른 목소리는 학교 현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정당한 평가 절차를 거쳐 기준에 미달하는 자사고를 퇴출하는 것은 교육당국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다. 반대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의 인성 계발과 실력 향상에 매진해온 자사고들은 모두 재지정되는 것이 상식이다. ‘자사고 폐지’라는 한 가지 목표를 정해 놓고 군사작전을 하듯 밀어붙이면 나중에 많은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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