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주성이란 별이 하늘에 없었겠고,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땅에도 분명 주천이란 지명은 없었으리. 천지가 다 술을 사랑했으니/술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청주는 성인에 비견된다 들었고/탁주는 현자와 같다고들 말하지. 성인 현자가 다 술을 마셨거늘/굳이 신선을 찾을 필요 있으랴. 술 석 잔에 대도와 통하고/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일되지. 술에서만 얻는 이 즐거움,/깨어 있는 이들에겐 알리지 말지어다.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월하독작(月下獨酌)’, (이백·李白·701∼762)
술은 한시의 영원한 주제. 음주시의 대표 주자라면 단연 이백을 꼽을 만하다. “자고로 성현들은 다 적막하지만 술 마신 자만이 그 이름을 남겼노라”고 했던 이백. 두보는 그를 “술 한 말 마시는 동안 시 백 수를 지었고, 술집에 곯아떨어져 황제가 불러도 나 몰라라 했던 주중선(酒中仙·술을 마시고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라 불렀다.
이 시는 한 애주가의 지독한 음주 찬가다. 예나 지금이나 기쁘건 슬프건, 설령 일 없이 무료할지라도 주당의 음주 핑계는 막무가내다. 그런 핑계를 이백이 나서 논리적으로(?) 방증한다. 하늘과 땅, 성현, 대도의 통달과 자연합일 등을 동원해 애주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청탁 불문의 근거를 성인, 현자에게서 찾은 건 애교요, 술 없이 사는 이들에게 ‘취중의 즐거움’을 비밀로 하라는 훈계는 순진한 선동이다. 이 시는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던 40대 초반에 지었다. 따라서 취중의 즐거움이란 것도, 또 성현과 신선을 끌어들인 것도 기실 내면의 울적함을 취기로 달래보려는 일종의 자기 마취다. 술은 불우한 시인을 마취시키기도 하지만 술 없는 삶이란 또 얼마나 삭막했으랴. 이 시는 4수로 된 연작시 가운데 제2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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