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장자도 구글도 ‘無의 사막’에서 찾은 혁신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4일 03시 00분


사람은 누구나 ‘정해진 세계’에 태어난다. ‘응애’ 하고 첫울음을 터뜨리면서 엄마 배 속에서 나오는 순간 세상의 그물망은 이미 짜여 있다. 국가, 정치 체계,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등 모든 변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채로 존재하며 삶의 초기 조건을 결정한다.

‘이상적 세계’는 정해진 세계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조직과 사회를 혁신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이상적인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의지이면서 욕망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집념과 희망을 상징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네오는 빨간 약을 먹고 이상적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전사의 길을 택한다.

현실 세계에도 네오처럼 이상적 세계에 대한 갈증으로 빨간 약을 집어 드는 부류들이 있다. 버닝맨(Burning Man) 축제 참가자들이 대표적이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이들은 매년 8월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9월 첫째 주 월요일까지 미국 네바다주의 블랙록 사막에 모인다.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다. 인위(人爲)가 완벽하게 배제된 채 텅 비어 있는 공간이다. 경계도, 팻말도, 방향도 없다. 사막은 자연 그 자체의 자유로움이다.

버닝맨 축제에 모여드는 7만여 명의 참가자 중에는 실리콘밸리의 괴짜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대표적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세계는 부와 명예, 권력의 매트릭스로 짜여 있는 안전하고 탄탄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파란 약 대신 빨간 약을 선택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사막의 무(無)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의 에너지와 영감으로 자신의 삶과 기업, 그리고 세상을 끊임없이 혁신하고자 한다.

구글 사무실은 온통 버닝맨 사진으로 도배돼 있다. 구글은 버닝맨의 자유로움을 창업에 그대로 적용했다. 구글 사이트의 홈 화면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네모박스 하나만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여백이다. 사막처럼 텅 비어 있다. 야후와 알타비스타 등 기존의 검색 사이트들은 미사여구와 화려한 사진으로 홈을 꾸몄다. 방문객들을 오래 붙들어 두기 위한 전략이다. 구글은 거꾸로 했다. 방문객들의 발길을 잡지 않고 자유롭게 놔뒀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그들은 사막의 무(無)에서 얻은 혁신의 영감으로 실리콘밸리를 정복했다.

장자(莊子)는 실리콘밸리의 괴짜들보다 2500년 먼저 히피 정신을 설파했던 광인(狂人)이었다. 그는 유교라는 매트릭스로 직조된 정해진 세계를 거부했으며 우주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의 정신은 사막처럼 트여 있고 바람처럼 자유롭다.

장자는 ‘제물론’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월을 잊고 옳음도 잊는다. 오직 경계가 없는 곳으로 무한히 나아갈 따름이다(忘年忘義·망년망의 振於無竟·진어무경 故寓諸無竟·고우제무경).”

브린과 페이지가 함께 일할 전문 경영인 영입에 나섰을 때다. 18개월간 74명의 후보를 인터뷰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했는데 마침내 영입한 인물이 에릭 슈밋이었다. 이들이 그를 적임자로 낙점한 이유는 하나였다. 슈밋은 수많은 후보자 가운데 유일한 버닝맨 축제 참가자였다. 두 사람의 공동 창업자는 블랙록 사막의 가치와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구글과 함께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이들 모두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혁신적인 사고로 실리콘밸리의 정상에 올랐다. 시간이 가면 영감이 고갈된다. 도시의 소음, 조직 내 소음들이 깊은 곳에서 샘솟는 영감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해마다 무(無)의 세계, 사막을 찾는다. 장자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소리를 천뢰(天(뇌,뢰))라고 표현했다.

천뢰를 듣고 싶은가? 일상을 탈주해 사막으로 떠나 보라. 혹시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막은 사방이 모두 길이기에 내가 걷는 곳이 곧 길이 된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버닝맨 축제#이상적 세계#실리콘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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