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예고 없이 청와대 춘추관을 찾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뤄진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청 파문 수사를 두고 ‘DJ 죽이기’ 의혹이 불거지자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자청한 것. 노 전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터져 나온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며 “다이너마이트로 암석을 폭파할 때 장약을 아주 깊이 묻는다. 비밀은 깊이 묻을수록 크게 터져 나온다”고 했다.
최근 여권에선 북한 어선 귀순 파문을 두고 노 전 대통령의 ‘다이너마이트론’이 회자된다. 의혹을 위기로 키운 청와대와 군의 대응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를 깊게 묻은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다.
그만큼 ‘해상 노크 귀순’ 사건으로 비화한 이번 사태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청와대는 15일 북한 주민을 태운 어선이 삼척항 방파제에 들어와 있다는 주민 신고가 112에 접수된 지 18분 만에 핫라인으로 해경의 긴급 상황보고를 받았다. 이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와 국정상황실, 합동참모본부로 구체적인 귀순 과정이 담긴 상황보고서가 전파됐다. 북한군 특수부대에 지급되는 위장 무늬 군복을 입은 북한 주민이 3중 해상경계망을 뚫고 삼척항에 배를 댈 때까지 군과 해경이 포착하지 못한 만큼 경계 실패에 대한 비판은 피해 가기 어려운 상황. 당일 오후 해경이 이미 북한 어선 남하 사실을 공지하고 관련 보도가 쏟아졌지만 청와대와 군은 17일 첫 브리핑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책임 인정과 사과 대신 무시와 방관으로 첫 이틀을 보내며 전형적인 위기 대응 실패 단계를 밟아 나간 셈이다.
17일 군의 첫 브리핑은 축소·은폐 논란에 불씨를 댕긴 변곡점이 됐다. 청와대의 설명대로 군이 발표한 ‘삼척항 인근’이라는 표현이 삼척항 방파제를 포함한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더라도 ‘수 km 밖에서 표류하는 선박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는 군의 설명은 사실과 다른 책임 회피에 가깝다. 민감한 현안에 대한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면 추가 브리핑 등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군으로부터 이날 브리핑 내용에 대한 ‘대략’의 보고를 받고, 이날 브리핑 현장에 청와대 행정관을 보내고도 당일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뒤늦게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군의 브리핑 내용을 보고받고 군을 질책했다는 사실을 공개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의혹 앞에선 대통령의 질책도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파문의 불씨가 청와대 책임론으로 옮겨붙은 뒤 전면에 나선 청와대의 대응은 더욱 아쉬웠다. 청와대는 “축소·은폐 의도는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끝내 경계 실패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어선 귀순 사태에 대한 보도를 ‘사고’로 규정하며 “그런 보도가 나가선 안 됐다. 남북 관계가 경색된다”고 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에만 해도 군이 북한 주민의 귀순을 당일 공개한 사례는 차고 넘치는데도 침묵으로 사태를 키운 정부의 대응이 정상적이라는 주장이다. 뒤늦게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국가안보실도 소홀함이 있었다”고 청와대의 책임을 인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축소·은폐 논란을 스스로 키운 청와대와 군의 대응은 그저 소홀함으로 치부하기 어려워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노크 귀순 사태 당시 “6·25전쟁 때 북한 체제가 싫어 피란 온 피란민의 아들이고 특전사 군 복무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안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후보가 바로 저”라고 했다. 안보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이제라도 책임을 인정하고 잘못된 대응으로 위기를 키운 청와대부터 철저히 조사해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청와대에 걸린 ‘춘풍추상(春風秋霜·남을 대하기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대할 땐 가을 서리같이 엄격해야 한다)’의 정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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