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간이 달린다. 칼럼의 첫머리를 이 문장으로 해야 할지 “하지(夏至) 무렵이다”로 해야 할지 조금 망설였다. 동트기 전에 나가서 해 뜰 때까지 달리곤 하는 내게, 두 문장이 비슷한 여운을 띠기 때문이다. ‘달린다’거나 ‘하지’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마음속에는 푸른 듯 온화한 빛과 더운 듯 청명한 공기가 스친다. 달리기야 사시사철 즐길 수 있는 스포츠겠으나 이맘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흥이 있다는 뜻이다.
‘러닝’이나 ‘조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어감상 나의 취미는 ‘달리기’지 싶다. 운동화를 신고 양발을 차례로 내디뎌 경치와 경치 사이를 헤매는 일이 내게 아주 개인적이고 즉흥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세나 방식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대개는 정해둔 코스도 없이 내키는 대로 향한다. 공원을 달리고 싶은 날이 있고 한강변을 달리고 싶은 날이 있으며 불현듯 대학교 교정, 골목길, 번화가가 떠오르는 때가 있다. 그럼 그리로 발길만 돌리면 된다. 자주 달리는 장소에도 늘 새로운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꽃과 나무의 형태, 길에서 잠든 취객, 무슨 사연인지 이른 아침부터 등교하는 학생…. 달리기의 미덕 중 하나는 그날 무엇을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운이 좋은 날은 집 가까운 골목에서 특색 있는 음식점이나 여태 서울에 잔존하는 만화책 대여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행사를 일상 속 짧은 탐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마주칠지 알 수 없는 것은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영이나 웨이트트레이닝과는 반대로 달리기는 열중할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운동. 잡념은 떨쳐야 할 것이겠으나, 한시도 스마트폰을 떼어놓지 못하는 시대에는 도리어 마주할 시간이 귀하다. 지난밤 TV에서 들은 빼어난 농담에서부터 일상의 고민, 풍경에서 발견한 자연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달리는 사람을 찾아오는 상념은 폭넓기도 하다. 한강변을 달리는 인원을 ‘러너들’이라 통칭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 그것은 머릿수만큼의 저마다 다른 세계가 달리고 있는 광경이다.
달리기만큼 원시적인 운동도 드물 터. 재미있는 점은 이 운동이 불과 50년 전에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나이키의 창립자 빌 바워먼이 조깅을 설파해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기 전까지, 거리를 달리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1968년 기사는 조깅 트렌드를 이렇게 다루기도 했다. “소수의 괴짜들(unusual freaks)이 여가 시간에 거리를 내달리고 있다.” 그냥 살기도 피곤한 판국에 목적도 없는 질주로 체력을 소진하는 행위가 의아했던 것이다. 다만 나는, 그렇듯 삶이 피곤한 형식이기 때문에 달린다. 뜀박질을 마치고 돌아와 간밤에 잠옷이 내팽겨진 침대를 마주할 때, 얼핏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때때로 스스로를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힘껏 달릴 수도, 멈출 수도, 멋대로 접어들 수도, 내킨 듯 한순간에 계획을 뒤집을 수도 있는 사람.” 다소간 착각이겠으나,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활력이란 게 그런 확신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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