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4일 독일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를 찾았다. 현재 이곳은 동서독 통일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라이프치히 시위 30주년을 맞아 새 단장이 한창이었다. 교회 앞 번들거리는 돌바닥을 보며 1989년 10월 9일 이곳에서 촛불을 들었던 수십만 명의 시위대를 떠올렸다.
‘우리가 인민이다’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의 요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1985년 소련에서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동독 정부가 발맞출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자유, 슈타지(비밀경찰)의 해체, 해외여행의 자유가 핵심이었다.
시위는 베를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다급해진 동독 지도부는 해외여행 절차 간소화 조치를 발표해 사람들을 달래려 했지만 공산당 대변인의 실수로 국경 개방이라는 오보가 전파를 탔다.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베를린 장벽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동독을 사실상 지배하던 소련도 통일을 막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었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동독에선 통일을 염두에 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서독 마르크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는 구호도 나왔다. 통일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동독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이달 중순부터 열흘간 동독과 서독의 주요 도시를 누비며 여러 기관을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동독의 도시와 도로가 서독의 도시나 도로보다 깨끗해 보였다. 30년 동안 막대한 서독 자금이 동독으로 흘러간 결과였다. 동독의 소득이 여전히 서독보다 못하다는 뉴스도 볼 수 있었다.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가고, 주요 공업시설 대부분이 서독에 있는 탓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커 보였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었다. 라이프치히대의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동독인은 독일 전체 인구 중 17%를 차지했지만 사회지도층에는 단 1.7%만 진입했다. 차관급 관료 60명 중 3명, 군 장성 202명 중 2명, 연방법원 판사 336명 중 13명, 대사 154명 중 4명만이 동독 출신이었다.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쳤던 동독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는 같은 인민이 아니라 2등 국민이다’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에선 통일을 이야기할 때 대개 경제적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독일에 와서 마음의 통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한집에서 살 수 없다. 서독은 돈을 주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우리가 통일이 됐을 때 과연 남쪽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보다 나은 관용을 보일 수 있을까.
요즘 남쪽에는 독일 통일 과정을 연구하는 사람도, 관련 저서도 많다. 하지만 직접 독일에 와서 북한 출신으로서 지켜본 결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독과 북한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회상할 때 빠뜨리지 않고 슈타지를 떠올린다. 슈타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설명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미안하게도 다른 생각을 했다. 슈타지는 감시만 열심히 했을 뿐 처형은 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동독은 천국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점은 너무나 많다. 세습왕조인 북한이 수령에 대한 신격화를 포기하고 동독처럼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을까.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도회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져도 무력 진압하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국 TV 시청을 당국이 공식 허가하는 것 역시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대외적 환경이 다른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아 한국에선 각종 연구발표회가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독일 통일 연구는 대개 서독 중심의 시각이었다. 나는 독일을 둘러보고 앞으로 예멘을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통일 후 사회 통합을 이루지 못해 4년 뒤 내전으로 이어진 예멘이 지금은 오히려 한반도에 더 많은 시사점을 줄 것 같다. 예멘도 내년이면 통일 30주년을 맞는다. ― 라이프치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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