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 퇴근한 저를 위해 밥상을 차려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허그’를 해주려니 밀쳐냅니다. 덥고 끈적끈적하답니다. 이분이 진정 언제나 제 곁에 있고 싶어 하던 그 아름답던 새색시와 동일 인물인가요?
뇌의 변화로만 규정하는 ‘사랑’은 3단계로 진행되죠. 첫 단계는 성호르몬의 증가로 인한 이성에 대한 갈망입니다. 성에 대한 갈망이 고조된 상태에서 매력적인 대상을 만나면 사랑의 두 번째 단계, 상대방에게 홀딱 빠지는 강한 끌림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콩깍지가 씌어 눈이 머는 것이죠.
그 다음은 사랑의 하이라이트,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 생각나고 함께 있고 싶은 강박 상태의 단계입니다. 일종의 중독이기도 하죠. 이 단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들에 과도하게 긍정적인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고, 부정적인 것들은 외면하는 도취와 사고 장애도 동반됩니다. 오늘 소개하는 노래의 가사처럼 말이죠.
“당신 모습이 보이면 왜 새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걸까? 당신이 스쳐 지나가면 왜 늘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까? 왜 이 동네의 모든 여자들은 당신만 바라볼까? 아마 나처럼 당신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인가 봐.”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환희의 상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심한 경우라도 3년을 넘기지 못하죠. 그 다음은 현실적인 사랑의 시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은 상대방으로부터 존중과 친밀감을 얻지 못한 분노에서 비롯됩니다. 존중할 수 없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가 주는 현실적인 이득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호통 치기보다 자신이 이득을 포기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잘 살펴보면 존중할 자격에 대한 논쟁 밑에는 늘 사랑과 친밀감을 거부당하는 두려움과 분노가 있죠.
‘햇볕정책’은 배우자와 자녀들과의 갈등에서는 가장 효과적이고,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공격과 비난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로부터의 방어와 회피, 더 나아가서는 역공과 결별을 유발하니까요. 따뜻함으로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켜야 존중과 친밀감을 줄 수 있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좌절되어 입은 상처를 보여주어야 하죠. 그리고 상대방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나의 본모습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강자가 아니라 사실은 약자인 것을. 그래야 상대방도 자신의 욕구와 상처와 두려움을 꺼내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어려운 강의나, 말은 쉬워도 따라 하기는 어려운 설교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화내지 마시고 카펜터스가 더 나이 들어 발표한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Yesterday Once More)’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그 상태가 되어 보세요.
“행복했던, 멀지 않은 지난날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잃었던 친구 같은 그 샬랄랄라와 우우우가 들려오면, 잊고 지내던 가사들을 저절로 따라 부르고, 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널 사랑하던 그 시절로. 다만 이제는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부드럽고 친밀한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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