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내부 시사 후 여성 동료가 내놓은 감상이다. 극중 부부는 아이가 없다. 앵무새를 키우는 남편은 아내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가 없는 자신을 신경 써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그게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무심하다. 출근길에 운동화 끈이 풀어진 아내를 두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 버린다. 몸이 아픈 아내는 화장실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 운다.
나는 시사회 도중 영화 ‘인어공주’(2004년)를 떠올렸다. 전도연 배우의 1인 2역 연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화 주인공 나영은 때밀이로 일하는 억척 엄마와, 부인에게 구박받으면서도 착하기만 한 아빠 사이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어느 날 아빠가 집을 나가 버리고, 나영은 아빠를 찾아 고향 섬으로 간다. 그런데 느닷없이 ‘타임 슬립’을 해 스무 살 꽃다운 시절의 해녀 엄마를 만나고, 엄마가 짝사랑하는 미남 우체부가 아빠임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젊은 시절의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맞춰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남들과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사랑도 지키고 관리해야 하지 않나’란 것이었다. 이후 나이를 먹으면서 내 나름의 확신을 갖게 됐다.
‘사랑의 유지보수’는 사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넘어가는 포인트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자.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한 담론은 넘쳐나지만, 사랑을 관리하고 지켜 나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요령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멋진 다리를 지어 놓고 보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정작 삶에 필수적인 실용적 지식이나 교육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보다 부부 관계에서 더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이 배우자를 생각할 때는 자신을 인식할 때와 같은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남을 대할 때 ‘필터’ 역할을 하는 체면이나 예의, 조심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나 자극에 대응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멋대로 작용하기 쉽다. 남들과의 관계에선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애써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만,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하면 대뜸 화를 내거나 비난부터 하게 된다. 연애 시절엔 그렇게도 잘 참았는데 말이다.
스트레스에 대한 성숙한 방어기제는 미국 하버드대가 70여 년간 800여 명의 인생을 연구한 뒤 내놓은 행복한 삶을 위한 7가지 조건 중 하나다. 지속적인 교육과 금연, 적당한 음주, 규칙적인 운동, 적정한 체중, 안정적 결혼 생활이 나머지 조건이다. 각각의 요소는 독립적이면서도 나머지 요소와 서로 연결돼 있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아직도 종종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사랑에도 유지보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살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요즘엔 가끔 생각 없이 하려던 말을 참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때로는 가족이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남’이란 사실을 일부러 생각해 보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 지성으로 불린 작가 앙드레 모루아는 “성공적인 결혼은 매일 고쳐 지어야 하는 대저택과 같다”고 말했다. 우연인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에서 ‘당신의 칫솔에 손댈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잘해 주라(Always be nice to anybody who has access to your toothbrush)’란 대사가 나왔다.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고, 당사자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오늘도 같이 사는 그분에게 잘해 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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