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찾았던 일본 도쿄의 지하철역 곳곳에는 구인광고 잡지들이 넘쳐났다. 두툼한 책자엔 시간당 1000엔(약 1만840원) 정도의 파트타임 모집 광고가 빽빽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광고에 실린 일하는 노인들의 사진이었다. 심지어 홍보용 일러스트조차 입술 주변의 팔자주름이 강조된 모습이었다. 마치 ‘알바천국’ 광고에 청년 대신 어르신이 다수 등장한 식이다.
실제로 일본 공항 출입국 심사 보조인력부터 관공서 안내데스크, 백화점과 대형마트, 편의점에서 일하는 고령의 노동자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도쿄도청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고령자 단기·임시직 소개 기관인 실버인재센터에 등록한 구직자 회원들의 평균 연령이 74.5세라고 귀띔했다. 도쿄도 실버인재센터 회원 8만2000명 가운데 실제 취업자는 80% 정도(2018년 3월·도쿄도 기준)라고 한다. 최근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취업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고령화로 생산가능(만 15∼64세) 인력이 줄어든 일본에서 고령자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일하는 노인’은 세계적인 대세다. 미국에서도 인구 4명 중 1명(2016년 기준 23%)인 베이비부머(1946∼1965년생)는 역대 가장 강력한 ‘시니어 파워’를 자랑한다. 1986년 의무정년을 없앤 미국에서 55세 이상 노동자 비율은 매년 높아지고 있다.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에 따르면 2000년 18% 남짓했던 55세 이상 고용비율은 2017년 기준 23%로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일각에서는 베이비부머를 ‘퍼레니얼(perennial·영원한) 세대’라 부르며 노동시장에서 20, 30대인 ‘밀레니얼 세대’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고령자가 일터로 나서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연금 고갈 문제가 확산되면서 연금에만 기대기 어려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만난 한 50대 번역 프리랜서 여성은 “연금으로 가장 혜택을 받은 이들은 지금의 80대다. 하지만 앞으로 연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2013년 정년을 만 65세로 높인 데 이어 최근 만 70세로 높이는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고령화 대책으로 ‘나이 없는 사회’를 선언했다.
고령화 대책을 준비한다고 어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요미우리신문 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60세 이상 노동자는 3만3246명으로 전체 산재 사망자의 26%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일의 대부분이 체력 부담으로 젊은층마저 꺼리는 청소나 경비 등이 대다수다. 고령자 노동가치도 갈수록 폄하된다. CNBC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미국 55∼64세 노동자의 주급은 2007년보다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35∼54세 노동자의 주급은 4.7% 올랐다.
관건은 노동시장이 고령자와 공생하는 방식이다. 일본은 1975년에 설립한 실버인재센터가 ‘취업개척원’을 두고 기업을 직접 찾아가 고령자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업무를 개발하고 있다. 도쿄도청 관계자는 “정년 연장 정책으로 10년 후에는 단기직 일자리를 찾는 노인의 주연령대가 80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노인 안전 대책과 함께 매일 다른 건강 상태에 맞춰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그룹식 취업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다 보니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느냐는 노인들의 푸념도 나온다. 하지만 일이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가스가 기스요 일본 마쓰야마대 전 교수가 일본 장수 노인을 인터뷰한 책 ‘백 살까지 살 각오는 하셨습니까’에 따르면 ‘정해진 일과 중심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 ‘유대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노인이 기력을 유지하는 데 근본이 된다. 베이비부머가 퍼레니얼 세대로 활약하려면 더 나은 고령자 일자리가 필요하다. 좋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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