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245석 중 124명 뽑는 참의원 선거, 유세 현장은 조용 vs 온라인은 시끌
개헌선까지 육박할 수 있다는 전망… 현실화 땐 ‘전쟁 가능한 일본’ 눈앞
7일 오후 5시경 일본 도쿄 기치조지(吉祥寺)의 상점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등장했다.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둔 그는 이날 도쿄에서 첫 지원 유세를 했다. 상점가를 20여 분 걸으며 행인들과 악수했고 사진 촬영 요청에 응했다. 10대 여학생 3명은 총리와 사진을 찍은 뒤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인파 중 한 30대 남성이 갑자기 “아베, 꺼져”라고 외쳤다. 곧 다른 이가 “총리, 힘내라”라고 응원했다. 이런 반대파의 야유를 피하기 위해 총리실은 유세 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참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낸 후보자는 13개 정당의 총 370명(무소속 포함). 배지를 달 수 있는 사람은 124명이다. 참의원 임기는 6년이고 전체 의석수는 245석이지만 3년마다 절반가량 선거를 치른다. 지역구 의원은 유권자 수에 비례해 1∼6명까지 있다. 6명을 뽑는 선거구는 도쿄도가 유일하다. 1명만 뽑는 ‘1인구’가 전국에 35곳이다. 불과 몇 표 차로 당락이 갈릴 수 있다. 여기선 2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여야 모두 ‘1인구’를 핵심 승부처로 여기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12년 말 두 번째 총리 취임 후 네 번의 선거(중의원 두 번, 참의원 두 번)에서 모두 이겼다. ‘선거의 아베’로 불리는 그가 이번에도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15일 일본 주요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자민·공명당 연정의 과반 확보가 확실시된다. 관건은 ‘전쟁 가능한 일본’으로의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석을 넘기느냐에 달려 있다.
○ 현장 vs 온라인의 온도 차이
1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한 뒤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5일 마이니치신문은 한 자민당 간부가 후보자들에게 “유세 때 대(對)한국 수출 규제 강화를 언급하라”며 이를 선거 전략으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실상은 어떨까.
6일 도쿄 무사시코야마(武藏小山) 상점가 유세장을 살펴봤다. 자민당이 도쿄도에 낸 후보 6명 가운데 한 명인 유명 여성 정치인 마루카와 다마요(丸川珠代·48)의 유세 현장이었다. 그는 아베 내각에서 환경 및 올림픽 담당 장관을 지낸 재선 현역 의원. 빨간색 상의를 입은 그는 약 100m를 걸으며 상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무사시코야마역 앞에서는 마이크를 잡고 “올림픽 담당 장관의 경험을 살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겠습니다. 육아에 좋은 환경도 만들겠습니다”라고 했다. 한국 얘기는 없었다.
아베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7일 도쿄 안에서만 총 7곳에서 연설했지만 단 한 번도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자민당 간부나 후보도 마찬가지였다. 유권자들이 외교안보 문제보다 민생(民生)을 더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최근 NHK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유권자들은 △사회보장(32%) △경제정책(22%) △소비세(19%) △외교안보(8%) △헌법 개정(7%) 순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한국이 참의원 선거 의제가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주요 언론은 실시간으로 관련 소식을 집중 보도하고 있다.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는 더하다. ‘한국 때리기’가 도를 넘는 수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결국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이라며 일본 정부에 ‘외교의 장’으로 돌아오라고 주문했다. 이를 전한 요미우리신문 인터넷 기사에는 하루 동안 약 1만5000개의 부정적 댓글이 달렸다. “문 정권이 한일관계를 파괴해 어쩔 수 없다” “책임은 한국에 있다” 등 비난 여론이 폭주했다. 한 일본인 지인은 “그렇게 많은 댓글이 달린 기사는 처음 본다”고 했다. 한국 관련 기사는 일본 최대 뉴스포털 ‘야후 뉴스’에도 꾸준히 오른다. 17일 현재에도 ‘가장 많이 본 뉴스’ 5개 기사 중 3개가 한국 소식이다. 부정적 내용 일색이다. 아사히신문 등 주요 일간지와 지식인들은 정부의 조치에 경계의 목소리를 나타내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15일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6%는 “수출 규제 강화 조치가 타당하다”고 답했다. “타당하지 않다”는 답은 불과 21%였다.
○ 전쟁 가능한 보통 국가
참의원 선거의 공식 유세가 시작된 날은 4일이다. 1일 발표했던 수출 규제 조치가 실시된 날과 일치한다. 아베 총리는 첫 유세지로 동일본 대지진의 직격탄을 맞았던 후쿠시마(福島)를 찾았다. 연단에 선 그는 “이번 선거는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해 논의할 후보자와 정당을 고르는 자리다. 자민당은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한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고 강조했다. ‘논의한다’는 단어를 언급할 때는 주먹도 불끈 쥐었다. 이번 선거 대승으로 반드시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의지가 넘치는 순간이었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두 번째 총리 취임 후 줄곧 “일본을 다시 찾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근간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그 핵심이 바로 군대 보유 및 교전을 금지한 헌법 9조, 즉 평화헌법 개정이다.
아베 총리는 헌법 9조 1항(전쟁 포기), 2항(군대 보유 금지 및 교전 불인정)은 그대로 두되 새로운 조항에 자위대 존재를 기술하는 일종의 ‘우회 상장’으로 사실상 전쟁 가능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자위대 해외활동 확대, 무기 수출 허용 등 아베 2기 정권이 벌인 주요 정책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17년 5월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도 “내 시대의 사명은 자위대 합헌화”라고 주장했다.
헌법에 자위대 존재가 기술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유명 헌법학자 히구치 요이치(樋口陽一) 도쿄대 명예교수는 5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일본법에 따르면 뒤에 만들어진 법은 앞에 만들어진 법에 우선한다. 자위대 조항이 추가되면 먼저 만들어진 전쟁 포기 및 군대 보유 금지 조항이 효력을 잃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아베 총리, 말 실수로 논란
개헌하려면 중의원(465석)과 참의원(245석)에서 각각 3분의 2 이상이 발의하고, 국민투표에서 과반이 찬성해야 한다. 현재 중의원에는 개헌 찬성파가 3분의 2를 넘는다. 그래서 이번 참의원 선거가 중요하다. 참의원 의석 중 3분의 2인 164석을 확보하면 곧바로 개헌 작업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참의원 선거 때도 개헌 찬성파 의석은 3분의 2를 넘었다. 하지만 2017년 초 아베 총리 부부가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모리토모(森友), 가케(加計) 등 각종 학원 비리가 터졌다. 아베 정권이 코너에 몰리면서 개헌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아사히신문은 15일 한 총리 주변인을 인용해 “이번은 진심이다. 참의원에서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면 총리는 단숨에 개헌을 발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 해도 헌법 개정은 또 다른 문제가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국민투표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연립여당 공명당 의원 중 상당수가 헌법 개정 문제에는 부정적이라는 점도 아베 정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거 지원에 나선 아베 총리가 말실수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16일 니가타현 조에쓰시 유세에서 시민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들은 애인을 유혹하고, 어머니들은 옛날 애인을 찾아내 투표소를 찾아 달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지금도 애인이 있냐는 지적과 함께 불륜을 조장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마이니치신문은 “혼자 투표하는 것은 쓸쓸하니 친구, 가족, 애인과 함께 투표장에 가라는 말을 많이 하곤 했지만 이날 발언은 ‘탈선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2006∼2007년 첫 집권 당시 유약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본본(坊坊)’이란 비판을 받았다.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을 뜻하는 일본 속어다. 하지만 2012년 12월 재집권 후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를 주도해 온 그를 두고 더 이상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 참의원 선거를 거쳐 헌법 개정까지 밀어붙인다면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강력한 일본 최고 권력자로 남을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한 강경한 행보까지 겹친 상황이어서 21일 선거 결과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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