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피에몬테에 위치한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 자국 음식을 알리고 싶었던 이탈리아 정부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ICIF는 요리 수업과 함께 와인 강의, 현지 레스토랑 체험이 포함된 6개월 과정이었다.
학교는 언덕이 높은 아스티 피에몬테에 위치한 오래된 성에 자리했고, 기숙사는 맞은편 언덕 아래쪽이었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다. 수확을 앞둔 포도는 알이 작고 두꺼운 껍질과 씨를 가졌는데, 향과 맛이 우리가 흔히 먹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요리 수업에서 파스타의 알덴테(씹는 맛이 살도록 삶는 방법)와 크림처럼 부드러운 리소토를 만드는 법을 익힌 후에 나의 관심은 자연스레 와인으로 기울었다.
와인 강사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였고, 젊은 여성 보조강사는 영어로 통역과 세팅을 도왔다. 강사는 약간의 상식선을 벗어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까칠했는데 보조강사는 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수업방식은 남달랐다. 보통 포도종이 가진 특성을 설명하고 와인을 시음하는데 그는 시음 후 묻는 방식을 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2년 연속 소믈리에 우승자였다. 와인 강좌에 사용되는 요리를 준비하겠다고 자청한 우리 부부는 전채 요리에서 메인, 디저트, 초콜릿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까칠한 강사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현재 맛보고 있는 와인,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 그의 기억 속에 남겨진 추억의 음식까지 기억에서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요리 강사의 포도수확을 돕기 위해 새벽같이 포도밭으로 향했다. 후식용 백포도주를 만드는 아주 단맛의 황금색 포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구름 속의 산책’(1995년)에 나오는,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통속에서 맨발로 포도를 짓이기는 주인공을 상상했다. 그런데 웬걸. 가위를 들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포도송이를 자르다 보니 허리가 너무 아팠다. 강한 가을 햇빛에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로맨틱한 영화의 장면은 상상일 뿐이었다.
일을 마친 뒤 저녁식사에 초대됐다. 80세를 넘긴 요리 강사의 어머니는 아주 작은 전통 부엌에서 수일 전부터 준비했을 것 같은 수많은 요리들을 내놓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음식은 닭의 모래주머니와 간, 볏 등을 포도주로 삶아 만든 ‘라 피난지에라’로 200년 전통의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던 지역 특산요리였다.
이전 해에 만들었다며 맛 보여준 레드와인은 시고 쌉싸래한 맛이 났다. 노하우 없이는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2014년 이탈리아 와인 프로모션 행사가 서울에서 열렸고, 우리가 운영했던 레스토랑도 참여하게 됐다. 행사에 온 총괄 책임자는 과거에 만났던 그 와인 강사였다. 결혼 후 세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지갑 속에서 꺼낸 사진 속에는 안절부절못했던 보조강사가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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