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겐 남모르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무엇에든 쉽게 마음이 동하고 큰 고민 없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반면, 그 추진력에 비해 지속성은 한없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고 하고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고 하는데 나는 늘 대여섯 개의 우물을 한번에 팠다. 운이 좋으면 한두 개는 끝까지 파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단 하나의 우물도 제대로 파지 못했다. 이런 나를 향해 누군가는 혀를 찼고 또 누군가는 진심어린 조언을 건넸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지.”
우직하게 한 우물만 끝까지, 제대로 파는 것이 꽤 오랜 기간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한 가지 목표 혹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뜨내기로 불렸고, 끈기가 부족하거나 무능한 이로 분류됐다. 하지만 근래 들어 다원화된 삶의 지향과 모든 이가 콘텐츠 생산자로 변모한 시대의 변화로 이러한 관념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슬래셔(Slasher)’는 영단어 ‘slash(/)’에서 온 말로 여러 직업으로 다채로운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 ‘/’로 직업을 나열하기에 붙은 명칭으로 국내에서는 ‘N잡러’라고 한다. 요즘은 주변에서 이러한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출간 작가, 강사 정도의 투잡은 이제는 흔한 축에 속하며 회사원이면서 유튜버, 웹소설 작가 등을 겸한다.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여유 시간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이에 취업규칙 중 하나인 ‘겸업금지’ 조항 관련 이슈가 불거지고 있다. 얼마 전 교사 유튜버 허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공무원은 법으로 영리 활동을 금지하고 있어 복잡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 사기업 종사자도 여기에 발이 묶여 제2의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업무상 만나는 웹소설 작가들만 해도 행여 회사가 알게 될까 노심초사한다. 가명은 기본이요, 잠깐의 통화도 금물이다. 유명 유튜버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퇴사를 하거나 활동을 접는 경우도 종종 있다.
명분은 근로자의 ‘성실 의무’다. 겸업이 본업에 지장을 주거나 직장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 비밀 유출에 대한 우려도 늘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기업의 비밀과 무관하게 퇴근 후 자신의 시간에 추구하는 영리 활동을 회사가 금지하는 것은 합당한가. 겸업이 아니더라도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본업에 지장을 주는 이도 있고, 겸업을 하면서 삶의 만족도가 상승해 오히려 본업의 능률까지 오르는 이도 있다. 퇴근 후 컨디션 관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이지 회사가 규제할 부분은 아니다. 일본은 회사의 이익이나 명예를 침해하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겸업을 금지하고 있다.
인생 이모작을 넘어 다작의 시대다. 한 농사를 끝내고 다음 농사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한번에 다품종을 재배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미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마당에 한 직장에 독점적인 애정과 무조건적인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쩐지 무책임하다. 누구보다 겸직이 필요한 것은 사실 당장 은퇴를 앞둔 이들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직업윤리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재능과 수입의 가능성이 애매한 사규 한 줄로 원천봉쇄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새로운 우물을 파는 일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즐거운 일이 아니던가.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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