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 판결문을 영어로 번역했다면 첫 장 맨 위의 사건번호와 사건유형은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2013다61381은 2013년에 6만1381번째로 한국 대법원에 접수된 민사사건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다.
이 사건은 대법원 접수 6년 만인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로 뒤늦게 판결이 확정됐다. 일본 측 주장대로라면 대법원 선고 직후 공개된 A4 49쪽 분량의 이 판결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작한 주요 단초 중 하나다.
그런데 대법원 홈페이지를 아무리 찾아봐도 이 사건의 영문 판결문은 없었다. 대법원 법원도서관은 대법원 판결문 중 해외에 소개할 만한 가치가 높은 것을 엄선해 영어로 번역해 왔다. 영문 판결문은 통상 선고일로부터 2, 3개월 뒤 대법원 홈페이지 등에 게시된다. 2000년 이후 영어로 번역된 대법원 판결문은 모두 1198건이다. 매년 60여 건, 월평균 5건 정도다. 한 법조인은 “최근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관심을 갖는 외국 법률 전문가들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영문 판결문 검색 조회수가 1000회를 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대체로 500회에 가까울 만큼 조회수가 많다.
특히 강제징용 확정 판결이 있었던 지난해에는 예년보다 다소 많은 판결문 84건이 영문으로 번역됐다. 월 7건꼴이다. 지난해 10월에만 9건의 영문 판결문이 게시됐는데, 여기에는 강제징용 확정 판결 당일 선고된 다른 판결문 3건이 포함돼 있다. 해외에서 생소할 수 있는 명예훼손이나 국민체육진흥법 관련 사건도 번역돼 영문 판결문으로 등록됐다. 강제징용 확정 판결 이틀 뒤인 지난해 11월 1일 선고된 양심적 병역 거부 사건도 영문으로 소개됐다.
강제징용 판결은 이들 판결과 비교해 번역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걸까. 대법원에 그 이유를 묻자 구체적인 경위는 설명하지 않고 “번역 여부가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고만 했다. 강제징용 판결문에는 한국 헌법이나 민법, 민사소송법뿐만 아니라 조약에 관한 빈 협약, 최신 국제법 이론 등이 곳곳에 언급되어 있다. 앞서 번역된 다른 사건들보다 국제법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다.
더 납득이 가지 않는 건 2012년 5월 대법원 소부(小部)가 처음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것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2012년과 2018년 판결은 선고 결과는 비슷하지만 그 논리 구조가 다르다. 더구나 소부는 대법관 4명이 만장일치로 판결하지만 전합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13명이 법률지식을 총동원해 갑론을박 끝에 결론을 내린다. 강제징용 전합 판결은 다수의견이 11명, 소수의견이 2명으로 나뉘었다. 다수의견은 다시 7명의 다수의견과 1명의 별개의견, 3명의 또 다른 별개의견으로 갈렸다.
국가마다 법체계가 달라 판결문 번역은 가장 전문적인 분야로 꼽힌다. 최근 외국 주재 한국 외교관들에게 상대국들이 “한일 양국 간 법적 쟁점이 뭐냐”고 자주 묻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말고, 강제징용 대법원 전합의 영문 판결문을 건네는 것이 외교의 시작 아닐까. 강제징용 영문 판결문이 없는 것이 혹시라도 대법원 판결에 흠결이 있어서, 또는 외국 전문가로부터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어서라는 오해를 불러올까 걱정된다. 이제라도 법원도서관이 그 판결문을 공들여 영문으로 번역해야 한다. 전 세계가 대법원의 법 논리와 판결 이유를 읽고, 국제사회에서 냉정하게 평가받아야 더 큰 분쟁에도 대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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