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 카스트로의 성공, 쿠바의 실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24일 03시 00분


내부의 적, 외부의 적 설정… 분열과 배제로 애국심 선동
‘내편 결집’―익숙한 생존공식
위기에는 자체적인 관성 있어 모두가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반미주의는 그에게 최강의 정치적 카드였다. 1962년 가을, 피델 카스트로가 ‘경제 기획의 해’라고 선포한 시기는 이미 ‘경제 파탄의 해’가 되어 있었다. 미국의 통상 금지 조치와 중산층 붕괴도 작용했으나 주된 이유는 경제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1962년은 핵전쟁 ‘0시 1분 전’의 벼랑 끝으로 치달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벌어진 해였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돕스는 당시의 G2, 즉 미국과 소련의 대치 상황을 복원한 책 ‘1962’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카스트로는 쿠바 위기를 끝낼 소련의 핵무기 철수 결정에 환영하기는커녕 반발했다. 초강대국 틈새에서 조국이 산산조각 날 핵전쟁의 두려움에 앞서 국민적 존엄의 추락, 이에 따른 권력의 생존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산업부 장관은 체 게바라. 혁명기의 풍운아는 경제에 무능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이론에 교조적으로 집착해, 경제를 망치고도 정치적으로 건재했다. ‘외세의 침략 위협은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억눌렀다. 망해가는 경제 속에 이념을 둘러싼 실망과 분열은 당분간 애국주의에 묻혔다.’

돕스는 쿠바 위기가 벼랑 끝에서 종식된 것은 양 대국 지도자가 전쟁을 목격한 세대였다는 점이 한몫했다고 주장한다. 현대사의 전환점이 될 뻔한 위기상황에서 적대적 국가 지도자는 각기 권한의 한계를 인식하는 등 ‘묵시적 공감대’로 사태 해결에 기여했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반세기 전 ‘국가 차원의 극단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케네디, 흐루쇼프, 카스트로 3인의 각인각색 대처 방식은 오늘날 한일 간 극한 대치에도 시사점을 준다. 위기상황을 부추기는 측근들의 조언 혹은 아우성, 정보와 의사소통의 왜곡, 국민의 높은 기대치 등등이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적 오판을 막을 의무와 권한은 리더에게 있다.

카스트로가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애국심 고취의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듯이, 안팎에 적을 설정하는 것은 ‘내 편 결속용’ 전략이다. 비록 해묵었어도 꽤 효과적이다. 권력자의 생존본능 앞에선 그 무엇도 무력하다.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선거만이 유일하게 법으로 허용된 전쟁”이란 말처럼 민주국가에서도 선거를 앞둔 시점에는 권력 방어가 최우선시된다. 그래서 리더가 가리키는 애국의 방향은 흔히 권력의 이익이다.

가령,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 당의 애국심 결핍증을 부각시킨다. 그 전략은 대중에게 제대로 먹힌다. 2016년 대선에서 압도적 백인 표를 얻었으니 인종차별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의 오랜 사업적 경험대로 판단한다면 틀린 계산은 아닐 것이다. 고정표 믿고 막 나가는 상업적 마인드가 정치를 압도할 때 나타나는 사례라 할 것이다.

한일 양국은 어떤가. 경제보복의 카드를 꺼내 든 이웃 나라 총리는 참의원 선거에서 낙승을 거두고 소원대로 정권을 안정적으로 지켜냈다. 이에 맞서 단호한 대응 의지를 표명한 한국 대통령의 지지율은 8개월 만에 최고치로 올랐다. 대통령의 법대 교수 출신 측근이 애국과 매국으로 선동하는 반지성적 발언을 꿋꿋이 쏟아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돌아보면 쿠바 사태는, 어차피 승리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교훈도 남겼다. 미국은 승리라고 자화자찬했지만 길게 보면 잃은 게 많았다. 파국의 순간을 넘긴 위기관리의 사례라며 고양된 자신감과 착시는 오만으로 연결돼 베트남전의 무모한 개입과 실패, 이라크에서의 오판의 빌미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렇다면 카스트로의 승리였을까? 반세기 가까운 권력의 결과, 카리브해의 빛나던 나라는 실패와 가난의 나락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위기는 그 자체로 논리와 관성을 갖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경로로 질주하는 속성이 있다. 우발적 사건이 복병처럼 등장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는지, 상황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온다. 막상 해결을 원하는 시점이 와도 더 이상 위기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불의 파괴력을 아는 사람이 불장난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쿠바 위기를 넘긴 케네디는 이듬해 암살당했다. 그때 대통령 부인 재클린은 흐루쇼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남편을 힘들게 한 것은, 전쟁이 대인에 의해서라기보다 소인에 의해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인은 자제력과 억제력을 발휘할 필요성을 알고 있는 반면 소인은 가끔 두려움과 자만에 따라 행동합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쿠바 사태#카스트로 성공#쿠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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