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집값 더 오를거란 기대심리에 임대료 치솟고 매물은 잠겨
2020년 미국 대선 앞두고 주택공급 공약 앞다퉈 내놔
미국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미혼 남성 A 씨(36)는 최근 옮길 집을 알아보고 있다. 근래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 한다. 빨리 비워 달라”고 했다. 현재 그는 국방부 청사(펜타곤)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인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산다. 방 2개짜리 아파트의 월세는 2200달러(약 260만 원). 새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지만 비슷한 가격에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올 들어 미국 집값이 눈에 띄게 오르면서 현재 비슷한 조건의 아파트는 최소 300달러의 월세를 더 내야 한다. 펜타곤이 위치한 버지니아주 알링턴은 아마존 제2본사가 들어올 예정이어서 집값이 더 들썩인다. A 씨는 기자에게 “근무지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아보고 있다. 연봉이 적지는 않지만 비싼 월세 및 건강보험 등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 대출과 월세에 신음하는 미국인
아마존 제2본사 설립의 여파는 워싱턴은 물론이고 인근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주로도 확산됐다. 버지니아 부동산회사 ‘메가 리얼티앤드인베스트먼트’의 제니 리 중개인은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높아 집을 내놓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당연히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어 “과거보다 임대료를 5∼10%는 더 올려 받는 집주인이 많다”고 전했다. 중산층 4인 가족이 선호하는 마당이 있는 방 3개짜리 집 가격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100만 달러(약 11억8000만 원)를 넘는다.
미국은 광활한 국토와 낮은 인구밀도를 지녔지만 대도시 부동산 상황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샌프란시스코(구글, 애플), 시애틀(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대형 정보기술(IT)업체 본사가 있는 지역에서는 ‘악’ 소리 나는 집값과 월세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백악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약 3700만 가구가 전체 수입의 30% 이상을 주택 대출 및 월세 등 부동산 비용으로 쓰고 있다. 이 중 절반인 약 1800만 가구는 부동산 비용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01년(약 1241만 가구)보다 45% 증가했다. 백악관은 “집값 인상으로 미국인의 건강보험, 교육, 식품, 교통비 지출이 줄고 있다. 삶의 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자녀를 키우면서 수입의 50%를 부동산 비용으로 지출하는 미국 가정은 같은 금액의 돈을 벌지만 부동산 부담이 낮은 다른 가정에 비해 식료품비는 35%, 건강보험료는 74%를 덜 쓰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사설에서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 가정에 현재의 집세는 너무 비싸다. 현 수준의 주택 개발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핵심은 공급 부족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간 120만 채의 집이 새로 지어지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전의 180만 채와 비교하면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하버드대 주택연구공동센터에 따르면 현재의 인구 성장률을 따라잡으려면 매년 최소 25만 채의 새 집이 필요하다. 활발한 이민 등으로 지금도 25세 이상 미국인 수는 연 2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 트럼프 “규제 완화해 주택 공급 늘려야”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인의 집값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주택규제개혁위원회’ 설치를 발표했다. 주무부서인 주택도시개발부를 비롯해 재무, 노동, 교통, 내무, 농업, 에너지부 등 내각의 주요 부서가 총동원됐다. 환경보호청(EPA) 국가예산관리국(OMB) 경제자문위원회(CEA) 등도 포함됐다. 사실상 외교와 국방 부서를 제외한 전 행정 부처와 관계가 있다.
벤 카슨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이끄는 이 위원회는 각 주(州)의 택지개발 및 주택건설 신청, 관련 허가, 세금, 투자 정책, 임대료, 주차, 밀도 제한 등 주택 관련 규정들을 꼼꼼히 따져 완화할 여지가 있는지를 살핀다. 에너지와 생활용수 등의 분야에서 과도한 환경 규제는 없는지 등도 들여다본다. NYT에 따르면 카슨 장관은 “교사, 간호사, 자동차 정비사, 건설 근로자, 경찰관 등 평균 소득을 지닌 미국인들이 주택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특히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공급이 필요하다는 뜻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이 위원회 설치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할 때 “방치된 지역사회를 다시 일으키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며 모든 미국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길을 찾도록 돕겠다”고 했다. 당시 백악관은 위원회 활동을 알리면서 “주택 관련 행정 규제가 미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주택 공급이 부족해지면 근로자들이 좋은 일자리가 넘쳐나는 생산성 높은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 이는 노동력이 필요한 지역에서 우수 인력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도록 해 미 경제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논리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정책이 ‘모순’이라는 비판도 제기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후 줄곧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에 금리 인하를 요구해 왔다. 금리가 낮아지면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 집값이 상승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 인구조사국(Census)에 따르면 2003년 24만3700달러였던 미국 신규주택의 평균 매매가격은 올해 5월 37만7200달러로 약 55% 상승했다. 다만 거시적으로 볼 때 미 주택시장이 과열에서 정상화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미 대표 주택지수인 케이스실러지수에 따르면 미 전역의 집값 평균은 2012년 후 연간 약 6%씩 상승했지만 올 들어 3.5%대로 상승률이 낮아졌다.
○ 2020년 미 대선에서도 주요 변수
안정적 주택 공급 문제는 2020년 대선에서도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민주당 대선후보 중 엘리자베스 워런(매사추세츠) 및 코리 부커 상원의원(뉴저지), 줄리언 카스트로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주택 공급 확대를 공약으로 내놨다.
특히 워런 의원은 택지 사용 개혁에 나서는 각 주정부에 100억 달러(약 11조7000억 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넓은 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택지개발을 꺼리는 일부 부자 동네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목표다. 특히 그는 부호들이 몰려 사는 미 북동부 및 태평양 연안 지역을 겨냥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부동산 개발업자인 트럼프 대통령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민주당 대선후보군이 더욱 적극적으로 부동산 공약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택규제개혁위원회를 설치한 것도 결국 재선을 위한 카드이므로 민주당도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대선 변수를 떠나 트럼프 행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규제 개혁 측면에서는 일관성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차례 “엠파이어스테이트 같은 큰 건물도 1, 2년 내 지어졌는데 지금은 건물 신축 인허가를 받는 데에만 10년이 걸린다”며 규제 철폐 의지를 강조했다. 경제 호조를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그는 부동산 외에도 환경, 에너지 등 전 분야에서 전방위적 규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 또한 행정부의 추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엘리자베스 코언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NYT에 ‘적절한 주택 제공에 실패한 시장’이란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미 정부가 주택 공급을 시장에 전적으로 맡겨온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미 주요 도시들이 아마존 같은 대기업을 유치하려고 과도한 세금 감면 혜택을 해당 기업에 부여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부동산 문제 등 공적 영역의 부담이 더 커진다”며 행정부 차원의 관심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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