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손님이 수입 맥주를 계산하면서 목청껏 말했다. “이거 일본 맥주 아니죠?” 자신의 애국심을 알아주길 바란 듯했다. 그 동네 편의점에는 일본인 점원도 있다. 만일 그 손님이 일본인 점원이 근무하는 시간대에 찾아와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며칠 전 아이 학교에서는 2학기 학생 임원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아이의 단짝 친구도 전교 부회장 후보 기호 5번으로 출마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학교를 ‘오(5)로나민C’처럼 만들겠다”고 하는 바람에 일본 제품을 홍보했다며 다른 아이들에게 비난을 받은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들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배경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는 대신 ‘무조건 반대’부터 배운 것 같아서 말이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하필 일본인이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차 타고 다니는 게 부끄럽다며 멀쩡한 자기 렉서스를 부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급기야 유니클로 소비자를 단속하려는 자칭 순찰대와 일본인 출입금지 업소까지 등장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과거 제국주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동일시하며 일본과 엮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쯤에서 거꾸로 생각해보자. 만일 일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입이 거부된다면? 재일(在日) 조선인 1세 여성 29명의 생존기를 기록한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라는 책에서 이명숙 씨는 말한다. “나 스스로를 황국 소녀로 여겼어. ‘조센진, 조센’이라는 말은 칼로 쑤시는 것처럼 끔찍하게 다가왔어.”
차별이 얼마나 나쁜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다. 우리도 이제 누구든 차별할 만한 힘이 생겼으니 되갚아 주자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될 말이기도 하다. 애국심의 발로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쪽바리, 토착왜구, 친일파, 매국노 같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넘친다. 몇몇 식자는 그 말의 정당성을 오히려 강변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과거 군부독재정권처럼 이적행위 운운하며 국민의 총화 단결을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던 자유한국당도 지지율이 떨어지자 부리나케 반일(反日)민족주의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국내에 거주 중이거나 여행 중인 일본인이 겪을 수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본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멀쩡한 자기 렉서스를 부수는 일이야 말릴 수 없지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아픔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된다.
한편 일본 시민사회는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를 철회하라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본 정부를 향해 “한국은 적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물음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좋든 싫든 일본과 함께 성장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전쟁이라며 대결을 부추기는 세력에 맞서 마땅히 이렇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은 적인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