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다시 지지 않으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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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 엄중한 위기 상황… 지난 역사 익숙한 반복인가
‘다른 생각=틀린 생각’ 공격… 대통령 8·15메시지, 갈등 봉합
‘하나 된 대한민국’ 계기 삼아야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실수 정도로 끝날 수도 있는 사태를 무지와 만용으로 더 크게 키우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다. 개인과 국가 차원 모두에 적용 가능하다. 합리적 의사결정을 못 하게 하는 이 우매한 치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경직된 사고 때문이라고 미국의 국제분쟁 전문가 자카리 쇼어는 말한다. 그는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의 배경을 7가지 심리 패턴으로 압축 분류한다. 자신의 나약함이 노출될까 두려워서, 복잡한 사안을 두고 그 원인이 뭔지 헷갈려서, 선 아니면 악이라는 1차원적 관점밖에 가진 것이 없어서 등등. 전문 용어로 ‘인지 함정’이라고 하는데, 그 덫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불확실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쇼어는 충고한다.

외교 안보 경제 등 나라의 안팎 상황이 온통 불확실성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비상시국에 대통령이 ‘남북 평화경제 땐 단숨에 일본 따라잡는다’고 언급한 다음 날 북한은 마치 응답을 내놓듯 미사일로 도발하는 무색하고 무안한 상황이 벌어졌다. 정치판은 더하다. 과학적 이성적 사고는 어디 가고 왜구 부역 매국이란 해묵은 단어가 역사의 창고에서 흘러나와 재생되고 ‘1965체제 청산’ ‘도쿄 여행금지 검토’ 같은 시대착오적 주장이 멀쩡하게 횡행한다. 그러면서 여야가 서로 ‘친일’로 몰아붙여 한국 사회 전체가 ‘친일’ 수렁에 빠져 버린 형국이다. 나라 밖에서 비웃는 소리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저마다 진영논리에 기반한 애국 마케팅이 극성이다. 19세기 말의 풍경이 연상될 지경이다. 요동치는 정국 속에 증시가 어제 한때 1,900 선마저 붕괴할 정도로 뒷걸음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 모든 상황의 밑바닥에 깔린 것은 ‘다른 의견=틀린 의견’이란 프레임의 덫이다. 거대한 쓰나미가 밖으로부터 들이닥치는데 안에서는 생각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동족을 먼저 공격의 제물로 삼는다. 게임 용어로 하면 팀킬(Team kill), 아군 공격이 한창이다. 생각과 해석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문제도 사실의 오류라고 낙인찍어 상대편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일. 역사교과서 갈피마다 배어 있는 그 오랜 유전자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그 숱한 경험들 말이다.

역사의 교훈에는 눈감고, 당장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감정적이고 자극적 단어만 꺼내어 활용하는 척박한 사회풍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국익에 대한 냉정한 통찰력과 현실주의적 윤리에 기반한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이다. 미 대통령들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널리스트 로버트 D 캐플런의 지적이다. 최근 재출간된 그의 저서 ‘21세기 국제정치와 투키디데스’에는 복잡다단한 도전에 직면한 리더에게 유용한 화두가 제시된다. 그에 따르면 지도자에 대한 최종 평가는 ‘좋은 의도’가 아니라 실질적 결과, 즉 ‘결과의 도덕성’에 좌우된다. 그 사례로 유화주의자들과 달리 나치의 본색을 일찌감치 간파해 저지한 처칠이 언급된다. 그는 약해진 영국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한 덕분에 국민정서나 대중여론에 휘둘리기보다 국익을 위한 선택과 결단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기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태세를 갖춘 다음 싸우고, 지는 군대는 싸움을 벌인 뒤 승리를 바란다고 손자병법은 일러준다. 선승의 조건을 갖춘 조직의 특징은 위아래 모든 구성원이 같은 꿈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중첩된 위기의 시대, 지도자의 소임이 그래서 더 막중하다. 다음 주 8·15 경축사를 통한 대통령의 메시지는 나라 안팎에 난국 돌파의 의지와 비전을 보여줄 적절한 타이밍이다. 일본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대한 지적, 결과의 도덕성을 기필코 쟁취하겠다는 확신과 더불어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통합과 연대의 가치다. 우리끼리든 일본을 향해서든 냉정을 잃으면 묵직한 울림은 전해지기 어렵다. 다층적 문제가 얽힌 상황에서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도 허언이 될 수 있으니 이겨내야 할 유혹이다. 훗날 국민의 힘을 결집한 연설로 오래 기억되는 통합의 언어를 기대하고 싶다.

집권 여당은 국회 당대표실에 ‘오늘의 대한민국은 다릅니다. 다시는 지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그 다짐이 현실로 되려면 모두의 합심이 절실하다. 내부에 적이 없을 때 외부의 적들은 당신을 해칠 수 없다고 처칠은 말했다. 누란의 위기가 외부로부터 닥쳤을 때 적대감을 내부로 돌리는 자학적 관습, 이제 결별을 고할 때가 됐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친일#한일 외교#한국 경제#8.15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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