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티 없는 세계[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7일 03시 00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월 이후 공식 석상에서 세 차례 경련 등 각종 이상 증세를 보였다. 65세 나이, 장기 집권으로 인한 피로 누적, 집권 기독민주당 지지율 하락으로 2021년 9월로 예정된 총리 임기를 지킬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픽사베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월 이후 공식 석상에서 세 차례 경련 등 각종 이상 증세를 보였다. 65세 나이, 장기 집권으로 인한 피로 누적, 집권 기독민주당 지지율 하락으로 2021년 9월로 예정된 총리 임기를 지킬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픽사베이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1991년 1월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 겸 집권 기독민주당 대표가 37세의 동독 여성 과학자를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앉혔다. 누가 봐도 남성 위주의 보수 가톨릭 정당인 기민당의 색채를 옅게 하려는 구색 맞추기 용도였다. 언론은 냉담했다. 새 장관의 수수한 외양, 동독 발음, “통일 후 신용카드 사용법을 배웠다”는 소박한 경험담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상한 단어를 연상케 하는 ‘콜의 여자(Kohl’s Girl)’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 당시 그를 ‘4선(選) 총리’ 재목으로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5년 11월 최고 권좌에 오른 그는 3명의 미국 대통령, 5명의 영국 총리, 4명의 프랑스 대통령을 상대한 서방 세계의 지도자가 됐다. 고실업과 저성장에 시달리던 ‘녹슨 전차’ 독일 경제를 되살렸고 미국의 일방통행, 중국의 급부상, 틈만 나면 몽니를 부리는 러시아, 옛 영광을 외치는 영국, 흥청망청 남유럽, 극우 민족주의가 휩쓰는 동유럽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며 독일과 유럽연합(EU)을 이끌어왔다. ‘무티(Mutti·독일어로 엄마) 리더십’의 결정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영국 저술가 제임스 호스는 3월 출간한 ‘독일의 가장 짧은 역사’에서 2013∼2014년의 독일을 ‘민주주의 이상향’으로 평했다. 당시 메르켈은 우크라이나 휴전 및 그리스 부채 협상 등 국제 현안을 주도했다. 현직 총리 최초로 나치가 독일 땅에 세운 첫 상설 수용소인 다하우도 찾았다. 그는 오바마케어로 정쟁에 빠졌던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을 대신한 명실상부한 자유세계의 최고 권력자였다. 2014년 독일이 24년 만에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영광의 정점에서 위기가 왔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 사태가 발발하자 그는 ‘100만 명 수용’을 외쳤다. 좋은 의도였지만 후폭풍이 엄청났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밀어닥친 난민들은 곳곳에서 주민들과 충돌했고 각국은 서로 부담을 떠넘겼다. 2016년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까지 겹쳤다.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가 기승을 부렸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됐지만 독재를 일삼는 각국 스트롱맨도 곳곳에서 출현했다.

난민 문제로 독일 내 지지율은 하락세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그의 주가는 더 올랐다. 그는 민주주의와 다자주의를 중시하며 예측 가능한 중도·온건 노선을 표방하는 거의 유일한 국제사회의 지도자다. 그가 아니면 누가 첫 만남에서부터 악수를 거부한 트럼프 미 대통령, 정상회담 장소에 집채만 한 대형견을 풀어놓고 협상이 삐걱대면 연필을 부러뜨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할까.

이런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미 “4번째 총리 임기가 끝나는 2021년 9월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혔지만 최근 건강 이상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말 기민당 대표직을 물려받은 ‘미니 메르켈’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국방장관은 아직 저조한 당 지지율을 되살리지 못했다. 당에서는 “총리 없는 조기총선은 필패”라며 반드시 잔여 임기를 채우라고 종용한다. 아프지만 퇴진조차 쉽지 않다.

독일 밖에서도 그의 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벨기에 싱크탱크 유럽정책연구소의 야니스 에마누일리디스 소장은 블룸버그에 “불확실성의 시대에 안정은 위대한 자산”이라며 그의 퇴장을 우려했다. 즉, EU 최장수 지도자의 은퇴 가시화는 국제 정치가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유럽은 난민, 저성장, 극우·극좌 득세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아시아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미국과 유럽, 서유럽과 러시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주던 그가 사라지면 세계 정치 흐름은 지금보다 더 포퓰리즘 일변도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2017년 그가 4연임에 성공하자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동방정책으로 데탕트(긴장 완화)를 이끌었고, 콜 전 총리는 통일을 이뤘다”며 4연임에 걸맞은 유산을 남기라고 독촉했다. ‘메르켈 없는 세상’을 우려하는 이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유산은 차고 넘치는 듯하다. 투박했지만 우직하고 묵묵했던 한 지도자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앙겔라 메르켈#독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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