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마켓스트리트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만큼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중요한 가로다. 그렇다면 브로드웨이와 마켓스트리트는 건축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에 두 도시에서 중요할까?
브로드웨이는 뉴욕 격자체계 도로시스템을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도로다. 규칙적인 격자를 브로드웨이가 관통하며 깬다. 그 깨진 곳에 마주 보는 삼각형 필지들이 생기며 뉴욕의 대표 광장(타임스스퀘어 광장과 헤럴드 스퀘어 광장 등)을 만든다.
마켓스트리트는 샌프란시스코의 두 격자체계 도로들의 접선 도로다. 샌프란시스코는 해안선에 따라 직각이 되게 도로를 깔다 보니, 도심에 남-북 방향 격자와 남서-북동 방향 격자가 생겼다. 마켓스트리트는 회전한 격자에 평행한 도로이다 보니, 회전하지 않은 격자에 많은 삼각형 필지를 만든다. 이 점이 마켓스트리트를 세계적으로 남다르게 하는 이유다.
뉴욕의 브로드웨이가 격자 도로와 부딪히며 뉴욕타임스 마천루 건립으로 타임스스퀘어가 만들어졌고 뉴욕 헤럴드 본사 건물 건립으로 헤럴드 스퀘어가 만들어졌듯이, 마켓스트리트에서도 신문사 본사 건물들이 길의 정체성을 부여한 곳이 있다. 바로 마켓스트리트와 커니스트리트 교차로다.
먼저 ‘샌프란시스코(SF) 크로니클’지 본사 건물이 1889년 교차로에 세워졌다. 그러자 길 건너에 ‘이그재미너’지가 세워졌다. 전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명문가 드영이 세웠고, 후자는 경쟁 가문인 허스트가 세웠다.
드영이 기업의 독과점 문제를 공격하며 신문 판매부수를 늘렸다면, 허스트는 매체 기술의 현대화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주제를 다루며 신문 판매부수를 늘렸다. 1890년대에 이미 허스트는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으로 드영을 앞질렀다.
허스트는 광산업으로 일어선 가문이었지만 그 후 신문과 군수사업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 조지 허스트는 미국-멕시코 전쟁에 깊이 관여했고, 아들 윌리엄 허스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만큼 신문을 불티나게 팔리게 하는 뉴스거리는 없었다. 전쟁은 허스트의 군함 제조 사업도 흑자로 돌려놓았다. 허스트가 부채질한 태평양 진출 전쟁으로 미국 인구는 파병과 군수산업을 위해 서부로 모였고, 허스트의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맞바꿀 것을 조장하기도 했다. 허스트는 미국 팽창주의를 옹호하며 요새도 유행하는 슬로건인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쳤다.
드영이 마켓스트리트에 먼저 세운 크로니클 본사는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철골 구조 마천루였다. 지어질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높았다. 건축가는 시카고의 대니얼 버넘과 존 루트였다.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를 연결하는 철로가 개통돼 크로니클은 시카고에서 막 뜨고 있는 마천루 건축가를 초빙한 것이었다. 땅이 뾰족한 코너를 가진 관계로 마천루는 아치를 모티브 삼아 남쪽으로 뾰족했고, 하늘에는 초록색 시계 타워로 유명했다. 드영에게 질세라, 허스트는 길 건너에 자기의 호텔 건물을 부수고 이그재미너 본사를 지었다. 아쉽게도 이 건물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오늘날 마켓스트리트에 서 있는 건물은 1912년 준공한 13층 높이의 마천루였다.
1937년 건축가 줄리아 모건은 본사 주 출입구와 정면에 철과 돌로 장식을 새로 했다. 모건은 곳곳에 허스트를 상징하는 ‘H’를 박았다. 모건은 피비 허스트가 버클리대에 기부한 ‘마이닝 빌딩’(1917년)을 통해 발군의 솜씨를 발휘했고, 이것이 눈에 들어 그 후 허스트 가문 건축가로 30년간 활동했다.
드영과 허스트가 지은 건물 덕분에 마켓스트리트의 중간 지점은 ‘신문의 길(Newspaper Row)’이라는 정체성을 얻었다. 오늘날까지 이곳은 SF 마켓스트리트의 노른자위 역할을 하고 있고, 두 건물 덕에 마켓스트리트는 이곳에서 브로드웨이에 버금가는 두 언론 재벌의 경쟁과 승자 이야기가 쏟아진다. 2000년 허스트는 SF 크로니클을 드영으로부터 인수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