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 연우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어릴 때부터 연우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여줬는데 특히 ‘겨울왕국’과 ‘라푼젤’, ‘라이온 킹’을 좋아했다. 이번에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실사 버전으로 나온다고 해서 우리는 큰 기대를 안고 극장으로 갔다. 하지만 연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에 별로 집중을 못 하고 지루해했다. 난 영화가 끝나자마자 물어봤다.
“영화 어땠어?” “주인공 일이 잘 안 풀려서 답답하고 지루했어.” “그래? 그래도 결말은 괜찮았잖아?” “아빠, 요즘 내가 영화를 왜 재미없어 하는 줄 알아?” “왜?” “주인공은 항상 일이 잘 안 풀려. 그리고 꼭 가지 말라는 곳에 가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문제를 만들어. 그리고 일이 안 풀린다고 힘들어해.”
뜻밖의 말에 대화가 이어졌다. “에이, 그러니까 영화지.”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항상 자기가 해결 못 하고 주변 사람을 통해 지혜를 얻어.” “음, 그러니까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지혜를 합쳐서….” “스토리가 다 비슷하다고. 그리고 아빠, 예전에는 인생은 스스로 해결하고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왜 지금은 함께해야 된다고 그래?” “어? 그건….” “하여튼 어른들 말은 매번 달라.”
아, 말문이 막혔다. 요즘 연우가 사춘기 기운이 강해서 그런지 말로는 절대 지지 않으려 하고 논리도 정연해져 대화를 하다 보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는데 며칠 뒤, 연우가 다시 라이온 킹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내 친구들도 라이온 킹 별로였대.” “왜?” “일단 걔는 사자 아들로 태어난 것도 남들보다 우월한데 아빠가 왕을 물려주겠다고 한 거 자체가 ‘금수저’잖아. 금수저로 태어나 놓고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찡찡거리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걔 때문에 다 잘못된 건데 왜 걔를 응원해야 돼?” “그래도 너 어릴 때는 좋아했잖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때의 감동이 실사영화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으로 봤을 때는 상상력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동물의 왕국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라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많은 미디어에 노출돼 있고 별별 기발한 영상을 모두 보고 자란 세대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 있으면 재밌을 거야!” 이런 기획으로는 절대 아이들 시선을 잡을 수 없다. 하나 더, 요즘 아이들은 기승전결의 스토리 구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 다음 바로 결로 가거나, 아니면 전과 결만 보기를 원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에는 15초 안에 모든 스토리와 반전이 담겨 있길 원한다. 뻔한 설정이나 고구마처럼 답답한 스토리 전개는 더 이상 스마트한 세대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아, 열두 살인데 벌써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니, 몇 번을 더 흔들려야 어른이 될까? 나도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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