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11년… 정착까지 아직 먼길
배심원-재판부 판단 93% 일치, 2심 파기율 29%… 일반 재판은 41%
“성범죄는 참여재판이 무죄 높아”… 일부 로펌서는 악용하는 사례도
사법 민주화 크게 기여 평가… 활용도 높이기 위한 법개정 움직임
“성범죄 가해자들, 무죄 받으려면 국민참여재판을 활용하세요.”
최근 일부 로펌이 성범죄 피고인들에게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를 받게 해주겠다며 내건 홍보 글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사기 수준의 홍보다.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좋은 제도를 악용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008년 첫발을 디딘 국민참여재판이 올해로 11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활용 사례가 미미하고 악용 가능성이 나오는 등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법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던 제도 도입 당시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도록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 1%대에 그친 활용률
국민참여재판은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2008년 1월부터 시행된 ‘한국판 배심제’다.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해 유무죄 판단을 한 뒤 판사에게 평의 결과와 양형 의견을 내놓는 재판제도다. 배심원단 평결은 권고적 효력만 있고 재판부가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미국식 배심제도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재판부가 배심원단 평결과 다르게 판결을 선고할 때는 반드시 판결문에 그 이유를 적어야 하고,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설명해 주도록 했다. 재판부가 배심원단의 판단을 어느 정도는 존중하도록 했다.
애초에는 살인 강간치사 등 중범죄 사건만 대상으로 했지만 2012년부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모든 형사합의부 사건으로 확대됐다. 대상 사건이라고 해서 모두 국민참여재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피고인이 신청하고 재판부가 이를 허용하는 경우만 가능하다.
2008년 2월 12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국내 사법 역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법정에는 일본 검사가 참관을 왔고 외신기자 등 취재진 100여 명이 몰렸다. 배심원 9명을 선정하는 데 86명의 배심원 후보자가 참석하기도 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방청객 150여 명이 법정을 메운 가운데, 검찰과 변호인은 배심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쉬운 용어로 풀어가며 법리 공방을 펼쳤다.
초기에는 “법을 모르는 일반 시민이 어떻게 재판을 하느냐”는 우려가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난해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6.6%가 “배심원 직무수행에 만족했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검사 시절 국민참여재판 도입에 참여했던 차동언 변호사는 “국민참여재판은 꼭 필요한 제도”라며 “판사와 변호사들이 귀찮아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론재판이 될 수 있다는 우려와 달리 배심원의 평결과 재판부의 판결은 대부분 일치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평결과 판결이 일치하지 않은 사건은 160건에 불과했다. 전체 사건 중 93.5%에서 배심원들과 재판부의 판단이 같았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이 2심에서 파기되는 비율도 낮았다. 지난 11년간 전국 고등법원의 1심 파기율은 41%인 데 비해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사건의 2심 파기율은 29.3%로 낮았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참여재판을 선택하는 비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민참여재판을 할 수 있는 사건 16만3524건 중 2447건(1.7%)만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렸다. 2011년엔 시행률이 4%대까지 올랐지만 2012년 다시 1%대로 곤두박질쳤고 이후 2017년까지 줄곧 1%대를 유지했다. 심지어 지난해엔 국민참여재판 시행률이 처음으로 0.9%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감정에 치우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피고인들이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재판의 판결 결과에 대해서도 재판 당사자들의 불신이 여전히 크다. 지난해 피고인이나 검찰이 국민참여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하는 비율이 80.5%에 이른다. 같은 기간 1심 형사합의 사건의 항소율인 62%보다 20%포인트 가까이 높다. 항소율이 높다는 건 그만큼 재판에 임한 당사자들이 재판 결과를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이다.
○ 성범죄 등에서 악용 사례도
일부 범죄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이 벌어지기도 한다. 일부 로펌은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국민참여재판을 권하기도 한다. A법무법인은 “배심원들은 재판부 의견과는 정반대로 무죄의 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며 “어떤 식으로든 다소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고 홍보하기도 한다. B법무법인은 “최근 대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도입해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국민참여재판이 유리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국민참여재판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범죄는 성범죄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665건의 국민참여재판 중 23%인 156건이 성범죄 사건이었다. 살인(44건), 강도(27건) 등 다른 사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실시된 국민참여재판 180건 가운데서도 성범죄 사건이 30건으로 전체 범죄 유형 중 1위를 차지했다.
성범죄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무죄율(재판부 판결 기준)이 다른 사건에 비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30건의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중 43.3%(13건)가 무죄 판결이 났다. 지난해 전체 국민참여재판의 평균 무죄율인 20.6%보다 20%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같은 해 전체 성범죄 사건 1만3052건의 무죄율인 3.0%(435건)보다는 40%포인트 높았다.
하지만 성범죄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높은 건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유무죄를 치열하게 다투는 피고인들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의 무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직업 법관이 아닌 배심원들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기 때문에 피고인에게 유리한 평결을 내린다는 전문가 분석도 있다. 홍진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사 시절 쓴 논문에서 “법관들은 강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건을 배심원들은 무죄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 적용 대상 확대 등 활성화 방안 모색해야
국민참여재판의 허점을 개선하고 활성화를 모색하기 위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대 국회에 계류 중인 국민참여재판 관련 개정 법률안만 6건에 이른다. 사법부도 국민참여재판 활성화를 위한 법률 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우선 국민참여재판의 시행률을 높이기 위해 피고인의 신청 없이도 국민참여재판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는 피고인이 재판부에 자신의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해 달라고 신청하면 재판부가 이를 검토해 신청을 받아들일 경우에만 진행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 법률안 중에는 ‘피고인의 신청이 없는 경우에도 법원이 직권 또는 검사의 신청에 따른 결정으로 국민참여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고의에 의한 살인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심판하는 ‘필수적 대상 사건’으로 정하는 내용의 국민참여재판 개정 법률안도 발의됐다.
배심원 자격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현행법상 만 20세 이상인 배심원의 연령을 민법상 성년 연령에 맞춰 만 19세 이상으로 낮추자는 제안이 나온다. 배심원단을 무작위 추출하는 방식에서 성별·연령별로 나눠 무작위 추출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개정안도 발의됐다.
재판부가 배심원 평결을 강제적으로 따르도록 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현재 배심원의 평결이 권고적 효력만 갖는 것이 배심원의 낮은 출석률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찰의 항소를 제한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으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 국민참여재판은 대안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높은 법대에 앉은 엘리트 판사 한 명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 시민의 눈높이에서 이뤄지는 재판 과정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재판’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문성과 중립성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원래 도입한 목적에 맞게 국민참여재판이 공정하고 충실한 재판을 통해 사법정의와 사법민주화를 이루는 초석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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