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여름에 한 달 밭을 비우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온 들판이 전설의 고향 세트장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여름에 프랑스 시댁으로 간 것은 와인 병입을 모두 끝냈기 때문이었다. 포도가 익기 전인 7월 한 달만이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레돔은 가장 먼저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삽목을 하고 옮겨 심었던 포도들은 잘 자라는지, 병충해는 덮치지 않았는지, 포도나무 골 사이에 심은 해바라기와 옥수수는 씨가 제대로 여물었는지, 그 모든 것의 안부가 궁금했다. 다들 무사하겠지!
“우와, 이건 완전히 점령된 숲, 잡초왕국이네.”
지구 저쪽은 비가 안 와 뜨거운 태양에 식물들이 노랗게 말라비틀어졌는데 이쪽은 장맛비에 잡초들이 얽히고설키어 승승장구 올라가고 있었다. 포도는 잎사귀만 겨우 보이고 옥수수는 잡초들에 포위당해 비실거리고 있었다. 이래서 농사를 짓는 것은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하는구나. 이 전쟁에서 인간이 질 수는 없잖아. 생존을 위해 우리의 곡식과 과일을 지켜야지. 나는 승리의 의지를 불태우며 얄미운 잡초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안 돼. 그렇게 뿌리째 뽑으면 땅속의 좋은 박테리아들이 빛에 노출돼 다 죽어. 이렇게 베어서 눕히는 게 가장 좋아. 백 번은 이야기한 것 같은데!”
레돔이 땅과 박테리아, 식물들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해서 깐깐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머리 위에는 태양이 이글거리고 목으로 땀이 줄줄 흘러내려 일사병으로 죽을 것 같은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바보 같다. 나는 잡초를 팽개치고 혼자 잘해 보라고 한 뒤 돌아왔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고집쟁이 남자를 욕하다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단잠에서 깨어나니 여전히 폭염이다. 잔에 얼음물을 채워 나가 보니 그새 잡초를 많이 베어 누여 놓았다.
“저기도 좀 베는 게 어때.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잖아.”
길목에 높이 자란 풀들을 가리키니 그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본다.
“그냥 두는 것이 좋겠어. 밭 한편에 야생 상태의 풀이 그대로 자라는 것도 괜찮아. 관리를 할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잡초야. 잡초 씨는 땅이 깨끗할수록 더 빨리 싹을 틔워.”
‘싸우는 식물’이라는 책에서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고 생존 전략을 세우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이 잡초였다. 질긴 것이 잡초라 생각하지만 사실 잡초는 약한 식물군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식물들의 쟁탈전이 벌어지는 숲에는 잡초군락이 생길 수 없으며 인간이 김을 매는 논이나 밭, 길가 같은 부드러운 땅이 생존적지라고 했다. 땅속에 숨은 잡초 씨앗들은 인간이 풀을 뽑을 때 햇빛에 드러나며 발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 매주는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잡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의 승자는 결국 잡초가 아닌지 모르겠다. 매면 맬수록 더 잘 올라오는 잡초.
“잡초와 인간,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야겠지. 식물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영리해. 저것 봐. 해바라기와 옥수수 콩이 정말 잘 어울려 자라지?”
온몸이 땀에 젖은 고집쟁이가 자신이 일군 밭을 사랑스레 바라본다. 포도밭에 콩이랑 옥수수, 해바라기, 이런 여러 씨를 심을 땐 싫었는데 지금은 참 보기 좋다. 콩 줄기가 옥수수와 해바라기의 긴 몸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걱정 마. 너무 세게 감아서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난 조금만 도움을 받으려는 것뿐이야.’ 콩이 이렇게 말하면 해바라기는 빙긋 웃는다. ‘네가 이렇게 감아주니 내 큰 키가 바람에 휘청대지 않잖아. 지난 장마도 네 덕에 견뎠어. 무엇보다 너의 푸른 콩잎 냄새가 좋아. 콩 익어갈 때 냄새는 더 좋지. 농부가 풀을 뽑아버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풀을 깨끗이 뽑아버렸다면 땅이 너무 뜨거워서 이런 더위에 내 뿌리가 다 말라버렸을 거야. 우린 주인을 잘 만났어. 아, 바람이 부네. 우리 흔들리지 않게 좀 더 껴안자.’ 해바라기와 콩이 알콩달콩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포도밭. 바야흐로 농부의 계절, 잡초의 계절이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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