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댁 다녀오는 길이었다. 모처럼 낮술도 한잔했고, 우리 집 세 식구는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정거장에는 모범택시 한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반택시 잡아타려고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런데 등 뒤에서 경적이 세차게 울렸다. 모범택시 기사는 차창을 내려 손짓까지 하며 자기 차에 타라고 경적을 계속 울리고 있었다. 일반택시 타겠다고 정중히 거절하려는데, 기사는 어차피 자기도 곧 퇴근할 거라면서 일반요금만 받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와 아이는 뒷좌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기사는 내가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대뜸 자기가 몇 살처럼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한눈에 봐도 여든이 훌쩍 넘은 노인이었지만 예의상 일흔 정도 돼 보인다고 대답했다. 기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기가 올해 여든아홉이고 내년이면 아흔이 된다고 했다. 기사는 마치 89년을 나만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의 자기 인생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선생, 내가 이래 봬도 말이오, 우리나라 최초의 럭비 국가대표 선수란 말이오. 잘나갔지 그때는. 그런데 여든아홉까지 살아보니까 인생 잠깐이야. 젊은 선생은 어떤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내랑 예수님밖에 없어요. 교회는 아내 때문에 다니기 시작했지. 아내와 한창 연애할 때 장인어른이 한번 보자고 하더군. 그래서 갔더니 장인어른이 아 글쎄 교회를 안 다니면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거야.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내와의 연락을 끊고 곰곰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야. 아내를 다방으로 불러냈지. 그까짓 교회 다니겠다고, 아내한테 내가 딱 그런 거야. 그랬더니 이 여자가 나를 부둥켜안고 막 울어. 그때 생각했지. 이 연약한 여자를 평생 지켜줘야겠구나, 져주는 게 이기는 거구나, 그게 남자의 도리구나.
“로맨티스트셨군요.” 나는 말했다. 그러자 모범택시 기사는 어디 다녀 오냐고 물었고, 처가댁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모범택시 기사는 잘했다며 짧게 대꾸하고는 하마터면 내 말 때문에 끊길 뻔한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 영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 40년 넘게 무사고인 비결, 자기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등등 기사의 얘기는 도무지 끊길 줄 몰랐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말은 오히려 더 빨라졌다.
문득 체호프의 단편소설 ‘애수’가 생각났다. 누구든 자기 아들의 죽음을 알아주기 바랐던 한 마부는 손님이 마차에 탈 때마다 슬그머니 아들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결국 마부는 모두 잠든 새벽 마구간에서 자기 말에게 아들의 죽음을 얘기한다. 나는 모범택시 기사의 말이 된 것 같았지만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택시비를 깎아줘서만은 아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아내한테 수고했다는 칭찬도 듣고, 이렇게 모범택시 기사의 이야기로 원고료까지 벌었다. 아이 말을 빌리자면 ‘개이득’인 셈이다. 김수선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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