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식인을 부를 때 ‘양심적’이란 수식어가 자동으로 붙는 사람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다거나, 유신독재 시절 한국 내 반독재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거나…. 진보학자이자 친한파로 널리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그 ‘양심적 지식인’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다. 만해 평화상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와다 교수는 지난달 25일 일본 사회지도층 78명과 함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은 적(敵)인가’ 제하에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철회와 양국관계 정상화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수교 이래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가 7월 초 일본 정부의 3개 첨단 소재 수출 규제로 더욱 나락에 빠졌고,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제외가 예고된 폭풍전야 같은 상황이었다. 이들은 “이번 조치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적대적인 행위”라 지적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아베 정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과 한국은 중요한 이웃 국가로, 서로 떨어질 수 없다”며 “아베 총리는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한 서명운동은 15일 1차마감까지 8404명이 참여했다. 인터넷 사이트 단순방문자는 23만 명을 넘었다. 서명과 함께 ‘수천년 이웃국가를 감정에 따라 대하면 안 된다’거나 ‘한일관계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댓글이 3600여 건 올라왔다. 재미있는 것은 서명운동 홍보를 한국 매체들이 자연스레 해줬다는 점이다.
“기자회견도 없이 인터넷 사이트만 띄웠다. 일본에서는 어떤 매체도 다뤄주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하루 몇백 명씩 서명이 들어와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한국뉴스를 통해 소식을 안 사람들이 몰려든 거였다. 2010년 ‘한일병합 무효’ 서명을 양국에서 모을 때는 각기 500명씩 모으는 게 목표였으니, 8000여 명이면 상당한 반향이다.” 이들은 31일까지 서명운동 기한을 늘리고 이날 도쿄 YMCA에서 ‘긴급집회’를 열 예정이다.
○ “한국 수출 규제 철회”에 20일 만에 일본인 8000여 명 찬동 서명
한국에서는 12일 원로지식인 67명이 ‘한일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일본 지식인들의 서명운동에 대한 화답이라는 설명도 붙었다.
“성명에서 우리를 특별히 언급해주셔서 감사했다. 4개항 제안에는 모두 찬성이다. 김대중- 오부치 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널리 보이는 적극적 주장이다. 다만 그 선언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을 빼놓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선언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일본 비판을 자제하고 협력의 자세를 내보였다. 한일관계를 걱정하는 층에서는 안도하는 분위기다(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와다 교수 귀국 후 이메일로 받았다).
“긍정적 내용이다. 특히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안보 경제협력을 계속해왔다. 일본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있어 피해자 고통을 실질적 치유하기 위한 노력, 역사를 거울 삼아 굳은 손을 잡으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대목이 좋았다. 이를 ‘그런 입장에 서서 노력해나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몇 달 전엔가, 한일관계 관계자로부터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오랜 세월 한국의 민주화를 도운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 민주화를 열심히 도우면 한일관계가 더 좋아질 거라 기대했는데, 한국이 발전할수록 반일(反日) 성향이 강해진다”며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와다 교수는 생각이 달랐다.
“한국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일본에 대한 비판이 더 확연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 실망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나 자신도 한국 운동단체의 비판 내용에 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이 늘 일본에 보다 깊은 반성을 하도록 촉구한 효과도 있다. 서로 발전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 위안부 재단을 보는 한일의 시각차
―오랜 관찰자로서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의 가장 큰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일본군 강제 동원) 위안부 문제부터 너무 꼬였다.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굴복’이란 표현을 써도 좋을 정도로 희생을 감수한 거였다.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금을 정부 재원에서 출연했다. 이는 1965년 청구권협정을 무시한 것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은 일본이 당시 민간 주도의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든 이유는 정부 돈을 직접 줄 경우 청구권 협정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아베 총리는 그 원칙조차 깼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반발이 심하다니 분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2015년부터 외교청서에서 한국에 대해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라는 문구를 제외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반면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인들 눈에는 무성의해 보였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합의 파기는 안 한다’고 했고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 엔도 한국 정부가 내겠다고 했는데 뭘 하겠다는 건지 모호하다. 재단을 해산했다는데 그 재단은 해산 전에 뭘 했는지, 일본 정부가 낸 10억 엔은 어떻게 됐는지 한마디 설명이 없다. 일본인들이 문 정권에 대한 불신감을 갖는 이유다. 물론 이 밖에도 대북정책을 둘러싼 아베 정권과 문 정권의 갈등도 있었다. 한미일이 3인 4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일본은 평창 올림픽을 전후해 ‘모기장 밖’으로 밀려났다.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은 더욱 간단치 않은 문제다. 한일관계는 전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분위기를 어디부터 어떻게 바꿀 수 있나.
“위안부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가령 한국 정부가 재단 해산에 대해 ‘전 정권이 정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국민 불만이 많아 실행하기도 어렵다. 우리로서는 이 상태에서 정리하고 다음 정책을 취하겠다’고 설명하고 돈은 어떻게 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생존자 48명 중 36명에게 1억 원씩, 유족 일부에도 위로금을 지급했다는데 이런 소식은 언론을 통해 소문처럼 흘러나올 뿐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대화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걸로 보인다.”
○ “국민끼리는 소통하고 힘 합쳐야”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적 자세 등이 문제라는 목소리도 큰데….
“지금의 일본 국민 대부분은 전후에 태어난 세대다. 그들에게 ‘식민지배 피해를 책임지라’고 말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일본의 사죄에 대해 ‘진정성이 없으니 다시 하라’는 요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지적대로 일본 정부도 문제다. 2015년 아베 담화 앞부분에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아시아인들이 기뻐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사실상 무라야마 담화의 전쟁 반성을 부정한 것이다. 아베 사관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는 반성하지만 한반도 병합을 위한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가 태도를 바꿔야 한다. 아베 총리는 올해 시정연설에서도 ‘중국 러시아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하면서 한국은 빼놓았다. 이런 자세를 바꿔야 한다.”
―한국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전혀 잡지 못했다. 징용공 문제로 문 대통령은 ‘일본은 겸허해야 한다’며 화만 낸다는 인상이다.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숱하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8개월간 아무 대답이 없다가 올해 6월 G20 직전에야 한국안을 내놓았다. 최근 한 월간지 광고를 봤는데 문 대통령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이 잘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배경으로 ‘남북한 vs 미일동맹’ 간 전쟁을 다뤘다. 한국은 저런 구도라도 상관없을까. 일본은 무척 곤란해할 거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은 협력해야 한다. 정부가 잘 못한다면 양국 국민이 나서서 협력하라고 요구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 성명에도 썼듯이 한국과 일본은 중요한 이웃국가로, 서로 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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