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강 한 굽이 마을 끼고 흐르고 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느긋하다.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대들보 위의 제비, 서로 사이좋은 물 위의 갈매기들. 늙은 아내는 종이에다 바둑판 줄을 긋고 어린 자식은 바늘 두들겨 낚싯바늘 만드네. 봉급 받아 쌀 대주는 친구 있으면 그만, 하찮은 몸이 이것 말고 무얼 더 바라리. (淸江一曲抱村流, 長夏江村事事幽. 自去自來梁上燕, 相親相近水中鷗. 老妻畵紙爲棋局, 稚子敲針作釣鉤. 但有故人供祿米, 微軀此外更何求.)―‘강촌’(두보·杜甫·712∼770)》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처자식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수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던 두보. 사천(四川)성 성도(成都) 근교의 완화계(浣花溪) 곁에 초당을 마련하고서야 ‘만사 느긋함’을 얻은 듯하다. 만사란 게 대단할 것도 없다. 제비와 갈매기의 정겨운 모습, 아내와 자식의 여유로운 몸짓을 지켜보는 소소함이 전부다. 하지만 이 느긋함조차 양식 대주는 친구 덕분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왠지 마음이 짠하고 아리다. 그런 도움도 결국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터. 느긋하다는 말이 오히려 앞날의 불안을 예감한 역설(逆說)처럼 느껴진다.
두보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었다고 할 초당 생활을 도운 친구는 당시 성도윤(成都尹) 겸 절도사(節度使)였던 엄무(嚴武). 그러나 그 인연마저 5년 만에 끊어지자 두보는 다시금 유랑의 길을 나서야 했다. “표표히 떠도는 내 신세를 무엇에 비기랴/천지간에 외로운 갈매기라네.” 성도를 떠날 무렵 시인이 떠올린 갈매기의 이미지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한 번 울면 천하가 놀라고 한 번 날면 구만리를 나는 붕새’가 되고자 했던 두보. 그가 맞닥뜨린 현실은 냉혹했다. 두 차례 과거에 낙방했고 현종에게 충정을 담은 문장을 세 차례나 올렸으며, 뭇 세도가들을 향해 자천(自薦)의 장편시를 10여 차례 보냈지만 끝내 그에게는 초당에서의 느긋함 그 이상의 인생 역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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