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제를 스스로 안 지킨 적 있었나[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일 03시 00분


과거 정부, ‘교역 친구’ 늘려 위기 돌파
요즘 기업은 경제보다 외교를 더 걱정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역대 최장이라는 미국 경제의 호황 국면이 막을 내릴 전조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미국 국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 폭이 12년 만에 최대치로 벌어졌다. 대개 장기채는 단기채보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금리가 더 높은 장고단저(長高短低) 추이를 보인다. 장기채 금리가 단기채보다 낮은 단고장저(短高長低) 현상은 통화긴축정책으로 단기 금리가 급등하거나, 미래 경기 불황이 예상될 때 나타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완화적 통화정책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장기 금리 하락은 경기 후퇴를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 국채시장에서 만기 10년 이상 장기채 금리가 2년물 이하 단기채보다 낮아지는 금리 역전은 1978년 이후 5번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에는 예외 없이 경기 침체가 있었다.

미국 경제의 부진은 세계 경제의 부진을 뜻한다. 수출의존형 경제인 한국엔 더 추운 겨울이 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우리는 경제 고비마다 수출로 위기를 넘겼다. 아직도 1997년 외환위기가 서구 자본의 농간 때문에 발생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그 전인 1994년부터 내리 4년간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 수입보다 수출이 적은 무역수지 적자가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환율 요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행히 1998년 한국은 1990년대 들어 처음으로 무역수지를 390억 달러 흑자로 반전시켰다. 그 덕에 나라 전체의 대외거래 성적표인 경상수지도 흑자를 냈다. 이처럼 수출로 달러를 벌어 외환위기를 넘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무역수지가 적자였지만 이듬해 수출 확대로 숨을 돌렸다.

수출은 공장에서 물건 잘 찍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부가 나서서 국가 간 교역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현재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고 있는 나라는 52개국이다. 그 대부분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다. 첫 FTA 체결국인 칠레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농업 부문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시작해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서명했다. 싱가포르, EFTA 4개국(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아세안 10개국, 인도, EU 28개국, 미국,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와의 FTA는 노무현 정부에서 협상을 개시했다.

현 정부는 우리 경제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 이후 대일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는 건 다들 안다. 하지만 대미 관계까지 악화일로인 것을 보면 ‘경제 안보론’의 외연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근본적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위치와 교역구조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문제다. 우리가 언제 경제를 스스로 안 지킨 적이 있었나. 우리 경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다. 이는 거미줄처럼 얽어 놓은 무역망과 국제분업 구조를 최대한 활용한 덕분이다. 요즘 기업인들이 본업인 경제보다 정부 몫인 외교를 더 걱정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글로벌 경기가 꺾일 때일수록 교역망을 탄탄하게 유지하게 하는데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다.

산업화 시대에는 덩치 큰 기업이 작은 기업을 잡아먹고, 정보화 시대에는 빠른 기업이 느린 기업을 잡아먹다가 지금은 구글이나 아마존처럼 스스로 생태계를 구축해 그 안에 친구를 많이 둔 기업이 친구가 적은 기업을 잡아먹는 시대다. 어디 기업만 그럴까 싶다.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가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한국수출#미국 경제 부진#자유무역협정#일본 경제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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