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날 지켜봐 줘!”라고 말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미국 뉴욕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불법 노동자였다. 영어는 잘 못했지만 갈색 눈과 곱슬머리가 매력적이고 머리가 좋은 친구였다.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의 버스보이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웨이터가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식당 손님으로 온 미국 태생의 멕시코계 마리아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결혼했다. 그들이 결혼할 때 나는 조촐한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찾아온 마리아가 울먹였다. “나한테 임차료와 생활비의 반을 내라는 거야! 난 아직 학교를 다녀야 해서 ‘알바’밖에 못 하는데…. 그는 나보다 10배는 벌면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라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친구는 “영주권 때문에 결혼한 거 너도 알지? 마리아가 싫다면 헤어져도 상관없어”라고 했다. 화가 나서 오랫동안 그를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을 같이 오픈하자고 전화가 왔다. “여기 리소토는 리소토가 아니야! 우리 엄마식으로 만들고 싶어.” 나는 그가 살던 동네의 요리사를 데려오라고 조언했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계 엄마와 프랑스계 아버지를 두었다. 그는 초대할 돈도 없고, 이민국에서 받아 줄 리 없다고 했다. 고민 끝에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요리 잘하는 친구를 설득해 같은 수준의 음식을 반값에 팔도록 조언했다. 당시 그가 일했던 곳은 ‘불레’라는 3성급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고물상에서 테이블과 의자, 접시를 구해 왔다. 와인도 레드, 화이트 한 종류씩만 팔았다. 뉴욕 소호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식당 ‘장 클로드(Jean Claude)’. 나무를 조각해 금박으로 그의 이름을 새긴 간판에 꽤 많은 돈을 썼다. 요리사와 그 친구, 단둘이 운영하는 프렌치 식당이었다. 예약도 안 받고 현금만 받았다.
‘훌륭한 음식에 저렴한 가격 그리고 매력적인 오너가 신선한 충격을 주다’란 내용으로 뉴욕타임스에 소개되더니 여섯 달 내내 줄서서 기다리는 유명 식당이 되었다. 이후 스테이크 하우스도 열었고 성공을 거두면서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후 제대로 된 이탈리안 식당을 오픈했으니 오라면서 돈은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지 15년쯤 되었을 때 그는 소호의 하우스톤 스트리트의 빌딩주가 되어 있었다. 지하와 1층이 식당, 2층은 게스트하우스, 3층은 살림집으로 그의 부모님도 있었다.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말했다. 이게 진짜 포르치니 리소토야! 부드럽고 진한 맛이 가을날 이탈리아 북부의 숲 향을 느낄 수 있는 맛이지. 리소토를 모르는 이들은 재료만 넣고 비비면 되는 줄 알지만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손맛이 있어.
확실히 부드럽게 흐르는 맛이 달랐고 훗날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하면서 그 친구 생각을 많이 했다. 건물에 여러 장 붙어 있는 흑백 사진은 마리아의 작품이었다. 두 딸과 함께 나타난 마리아를 쳐다보면서 그는 내 귀에 속삭였다. “처음에는 영주권 때문에 그녀를 만났지만 이제는 아니야. 진심으로 사랑해. 그래서 결심했어. 난 그녀와 이혼하고, 정식으로 다시 청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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