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과 다우딩[임용한의 전쟁史]<73>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3일 03시 00분



1940년 5월 15일 오전 7시 30분경. 영국 총리 처칠은 프랑스 총리 레노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우리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전투에서 졌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에 더 많은 지원을 요청했다. 그중에서도 절박하게 요청한 것이 바로 전투기였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프랑스 전선이 허물어지자, 땅 위를 기어가는 탱크를 하늘의 독수리들이 때려잡는 광경을 상상했던 것 같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에 474대의 전투기를 파견했었고 추가 파견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 논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치가였던 처칠은 내각에서 결정한 4개 대대에 6개 대대를 더해 10개 대대의 추가 파견을 결정한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처칠은 속까지 깎아내는 결정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영국 방어를 위해서는 공군사령관 다우딩이 말한 대로 25개 전투기 대대를 본토에 남겨두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하지만 다우딩이 주장한 숫자는 50개 대대였다. 그는 50개 대대를 확보하기 전에는 4개 대대조차 보낼 수 없다고 맞섰다. 다우딩은 이 논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뒤이어 벌어진 독일 공군과의 영국 항공전에서는 승리했다. 이 승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어떤 정치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상급자에게 대들기도 잘하는 다우딩의 고집스러운 투쟁 덕분이었다.

그 전부터 이후로도 다우딩은 정치인의 압력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방해, 반대를 꿋꿋이 이겨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존경해야 할 사실은 다우딩을 싫어하고 그의 뻣뻣한 태도에 질색한 권력자들도 전쟁 동안 그의 지위를 보전해 주었다는 점이다. ‘영국 전투’의 저자 마이클 코다는 이렇게 단언한다. 독일의 패배는 다우딩과 같은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인물을 용납하는 리더나 사회적 시스템이 없었던 탓이라고 말이다.

임용한 역사학자
#임용한의 전쟁사#처칠#다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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