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행복한 복숭아나무[포도나무 아래서]<35>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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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왼쪽)와 신이현 작가
이웃이 복숭아를 몇 박스 들고 왔다. 멍들었거나 깨알 같은 작은 점이 찍혔거나 나무에 긁히거나 눌린 것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겨울 가지치기부터 시작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복숭아나무에 매달려 꽃을 따내고, 열매와 잎을 솎아내고, 한 가지에 오직 한 개의 복숭아만 달아 그 누구도 흠집 내지 못하도록 봉지까지 씌워 애지중지 키웠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복숭아가 제일 예뻐 보일 때는 이른 아침이거든요. 이 두 손으로 이슬을 머금은 탐스러운 복숭아를 툭툭 따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무슨 권리로 이 나무에 달린 복숭아를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따는가, 하는 생각요. 그러니까 도둑놈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복숭아나무에게 이 복숭아는 내 것이라고 당연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문득 복숭아에 대한 권리가 그 나무인지 인간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는 귀농 2년 차, 올해 첫 복숭아를 수확했다.

“그런데 복숭아나무는 왜 달콤한 열매를 매달아 인간이 먹도록 유혹하는지 모르겠네.”

인간이 함부로 확확 따먹는 것이 싫었다면 복숭아나무는 그 열매를 이토록 달콤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많은 복숭아를 어떻게 처리한담. 알자스 시댁에서도 포도밭 한가운데 속이 새빨간 복숭아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포도밭에 자라는 복숭아를 최고로 쳤다. 시어머니는 병조림을 만들어 창고 선반에 가득 저장해 겨울 내내 먹었다. 카스텔라를 구워 먹을 땐 늘 복숭아 조림을 곁들여 빵을 촉촉하게 해서 먹었다.

“복숭아가 달콤한 것은 그 나무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래. 달콤한 꿀로 곤충을 불러 꽃가루를 옮기는 것처럼 그 열매를 새나 동물이 먹어 멀리까지 씨를 옮겨주기를 원했던 거지. 식물과 동물의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만 요즘엔 공생관계라기보다 인간이 식물을 이용하기만 하는 식물 착취에 가깝다고 생각해.”

레돔이 이렇게 말하자 젊은 농부는 얼굴을 붉힌다.

“겨울부터 지금까지 죽도록 복숭아밭에서 일했는데 식물 착취라니 너무해요.”

“꽃을 따내고 적과하고 농약 치고 영양제에 비료 뿌리고…. 이건 복숭아나무를 위한 것이 아니잖아. 인간의 이익을 위한 착취지. 그러니까 복숭아나무에게서 얻은 것에 대한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면 다른 것이 필요한 것 같은데. 가령 땅을 살려주는 일 같은 것….”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콧방귀를 뀐다. 지난번 뿌리 깊은 잡초는 뽑지 말고 베어서 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었다. 참 잘났다, 배가 부르니 그런 소리를 한다, 너나 그렇게 키워라 등등. 사실 내가 레돔에게 늘 하는 말이다. ‘뭘 그렇게 까다롭게 농사를 짓느냐, 남들 농사짓는 것까지 참견할 필요 없다.’ 그러면 그는 늘 똑같은 말을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도 늦었다. 이 상태로 가면 10년 후엔 돌이킬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솔직히 나도 내 농법을 바꾸고 싶어요.”

젊은 농부는 레돔의 땅 살리기 농법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겁이 난다. 복숭아가 하나도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한철 농사가 망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복숭아나무도 지구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면 돼.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제 좀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거야. 땅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뜨끈한 거름으로 몸을 데워줘 봐. 깊은 곳까지 햇살이 들게 하고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도록 해주면 복숭아나무는 잎을 팔락팔락 흔들면서 좋아하겠지.”

젊은 농부는 벌떡 일어난다. 자신의 복숭아나무를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나무로 만들어줄 태세다. ‘무엇보다 숲 냄새가 나는 유기질 듬뿍 든 검은 흙을 만들어야 해!’ 레돔이 그의 등에다 소리친다. 나는 복숭아 조림을 만들어 여름을 병 속에 봉한다. 안녕, 여름!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 작가#포도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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