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사와 관련해 짧은 자기소개를 요청 받았다. 하는 일과 지향점을 포함한 200자 자기소개를 쓰는 일이 2000자 자소서를 쓰는 일보다 어려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의 역할과 철학을 두세 문장으로 축약해 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나’라는 단어의 표면적, 심층적 의미에 대해 사전적 정의를 내리라는 숙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통상 ‘무슨 일 하세요?’라는 물음에 ‘회사명’으로 답한다. ‘○○ 다녀요.’ 하지만 타국에서 만난 이들의 경우 이런 대답을 들으면 의아해하며 되묻곤 했다. ‘그래서 너는 무슨 일을 하니?’ 그들에게 어떠어떠한 회사에 재직 중이라는 것, 즉 회사원은 직업이 아니었다. 고용주가 아닌 피고용인, 단지 그뿐. 내가 하는 일을 회사명 외의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는 일을 정의하는 것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바로 지향점이었다. 나의 가치관,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스스로 어렴풋하게나마 인지는 하고 있어도 그것을 문장으로 정리해 본 적은 감히 없었다. 기한이 있으니 어찌어찌 완성해 내놓기는 했지만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이후 물음 하나가 가슴에 남았다. ‘당신을 정의하시오.’
이후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 물음과 맥을 같이한다고 느껴졌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원제 The Last Word)에서 주인공 해리엇(셜리 매클레인)은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었을 때 듣고 싶은 말들을 앞서 생각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개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의되고 싶은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가족의 사랑’ ‘동료들의 인정’ ‘선한 영향력’ 자신만의 한 방인 ‘와일드카드’. 완벽하고 이상적인 엔딩을 위해 그는 각각의 요소에 맞는 재료들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자칫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대목인데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미리 쓰는 유언장이 인생무상의 자기반성적 성격이 짙다면, 미리 쓰는 사망기사는 관계, 업적, 가치의 측면에서 좀 더 객관화된 시각으로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리엇이 고른 항목에 스스로를 대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몇몇은 그럴듯한가 싶은데 다른 것들은 딱히 자신이 없다. 이윽고 ‘나라면?’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든다. 나라는 존재의 최종적 정의를 위해 나는 어떠한 요건들을 고려할 것인가. 이쯤 되면 머릿속에서는 이미 내 사망기사를 미리 써보고 있다.
내일 당장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떤 말들로 정의될까. 나아가 나는 어떤 말들로 기억되고 싶은가. 삶의 엔딩에서 나를 정의 내릴 말들을 미리 고민하고, 오늘 나의 정의와의 간극을 메우는 일. 보다 만족스러운 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은 분명하므로 일단 오늘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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