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54)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2016년 1월 14일 형사법 학계의 대선배인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79)에게 자신의 저서인 ‘절제의 형법학’을 건넸다. 책 앞쪽 간지에 조 후보자는 이 같은 문구를 검은 펜으로 꾹꾹 눌러쓰고, 서명과 낙인을 남겼다. 지난달 2일 정 전 장관의 서울 중구 개인서재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보게 됐다.
당시 차기 법무부 장관 하마평을 궁금해하던 정 전 장관에게 ‘조 교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 “되는 게 확실합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 전 장관은 “한국 형사법학계 교수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공부했는데, 조 교수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꾸준히 논문을 내면 학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 후보자의 미국 유학 시절인 1994년부터 인연을 이어온 정 전 장관이 후배 학자에게 닥칠 불행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뒤인 지난달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 교수를 재임 중 두 번째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딸의 고교 시절 의학 논문 제1저자 등재 등 ‘황제스펙’을 활용한 부정입학 의혹, 가족의 수상한 사모펀드 투자, 사학재단 사기 소송 의혹 등이 잇따라 불거졌다. 조 후보자는 본인 말대로 ‘만신창이’가 됐다. 여론을 돌려세우기 위해 펀드와 재단의 기부를 약속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대한민국 최고 수사부서인 서울중앙지검의 특별수사부 검사들은 조 후보자 관련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지난달 27일부터 30곳 이상을 압수수색했다. 조 후보자는 2000년 미국식 인사청문회 제도를 국내에 도입한 후 국회의 인사청문회 전에 검찰의 강제 수사를 받은 첫 사례가 됐다.
드물긴 했지만 미국에서도 공직자 검증 도중 수사기관이 나서는 경우가 있었다. 가깝게는 지난해 9월 브렛 캐버노 당시 연방대법관 후보자가 대표적이다. 상원의 인사청문회 도중 캐버노 후보자로부터 30여 년 전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상원은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미 연방수사국(FBI)에 수사를 요청했고, FBI 수사가 끝난 뒤에야 캐버노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조 후보자는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관직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했다. “나는 지금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았다” “장관이 되면 가족 수사를 보고하지 말라고 하겠다” 등 가족과 달리 자신은 수사와 무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정부조직법상 법무부 장관은 국가의 중추 수사기관인 검찰 사무를 관장하는 자리다.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고, 정치세력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오기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미 수사팀 내부에서는 “검찰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단순한 사건을 청와대와 여당이 게이트로 키웠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조 후보자가 이대로 장관직에 올라, 장관은 장관의 길을 가고, 검찰은 검찰의 길을 간다면, 임기 반환점을 돌지 않은 정권과 검찰이 정면충돌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도 미국처럼 해야 한다. 미국법을 공부한 조 후보자가 미국식 해법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조 후보자는 또 철저한 수사를 통해서만 검증 공세를 벗어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믿고,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 후보자의 임명을 보류해야 한다. 그렇다고 검찰을 무한정 기다릴 수 없으니 추석을 1차 시한으로 정하면 어떨까 싶다. 그 뒤에 임명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그것이 임명 강행이라는 엄청난 모험이 가져올 후폭풍을 줄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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