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잔뜩 화가 나 있을까?[시론/구정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4일 03시 00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울분… 지도자들의 이분법 사고와 편 가르기
과도한 경쟁, 경제 불황이 자양분… 젊은층이 그 누구보다 심각한 상태
계층 사다리 복원하고 공교육 혁신해야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전남편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고유정과 ‘한강 몸통 시신 살인사건’ 피의자 장대호는 공통점이 있다. 살인을 범하고 사체를 훼손·유기한 잔혹성도 그렇지만, 자신들의 패륜 행위를 뻔뻔하게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유정은 성폭행을 피하려다 우발적으로 범행했다는 논리를 폈고, 장대호는 반말에 화가 나 모멸감으로 그랬노라고 고개를 쳐들었다.

어떤 이유라도 폭력과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고, 반인륜적 행위에 면죄부를 안길 수 없다. 그런데 참 인면수심이다. 사체 손괴로 인륜을 배반한 자들이 ‘정당한 이유’를 들먹인다. 과도한 성욕과 가정폭력에 노출돼 심신 미약에 빠져서, 또 존재 가치를 부정당해서 칼과 망치를 휘둘렀다 한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살인을 부채질했다는 거다. 왜 참회는커녕 분노와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걸까? 왜 이들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고 있나?

분노조절 장애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마음속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누구나 분노하고 모욕감을 느끼지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외부로 표출됐을 경우 목숨을 빼앗는 행동까지 진격할 수 있다. 지난해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도 그랬다. 피의자 김성수는 무시당했다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일면식도 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개인적인 분노조절 능력, 우울감 등 정신적 질병 차원으로 논의를 한정하는 것은 본질적 설명을 어렵게 한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울분이 우리의 문제란 점이다. 앵그리사회, 분노사회, 성난 도시, 성난 청년 등은 최근 우리 사회를 표현할 때 종종 사용하는 말들이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는 한국에서 중증도 이상의 울분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14.7%로 독일보다 약 6배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위험 수준에 있는 39.9%를 더하면 국민의 반수 이상은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종업원은 손님에게, 직장인은 상사에게, 또 남녀는 서로에 대해 잔뜩 화나 있다.

울분과 분노가 발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내 노력이 보상받지 못할 때, 내 땀이 보람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좌절한다. 출발선은 다르지만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있다는 믿음이 조각날 때 분노한다. 세상이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믿음이 깨질 때 마음에 응어리가 생긴다. 이런 믿음과 신념이 깨지면 사람들은 누군가를 향해, 또 우리 사회를 향해 극도의 실망감을 표현하고 이는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신념 체계의 붕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 촉발된다. 연구자들은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 경제 불황, 양극화와 불평등, 과도한 개인주의를 울분사회, 앵그리사회의 자양분으로 꼽는다. 2018년 유엔의 행복보고서는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를 54위로 낮게 평가하면서 사회적 지지의 부재를 한 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인들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 없이 각자도생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젊은층의 분노와 울분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2018년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의 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30대에서 가장 뚜렷했다. 40대는 72.4%였지만, 30대는 80.4%였다. 정신건강 상태 점수도 젊은 세대로 갈수록 낮아진다(20대 66.7점, 50대 71.5점). 패륜 범죄자들의 연령이 점차 낮아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17년 인천 초등생을 유괴 살인하고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주범은 10대였다. 극단적 개인주의, 사회적 고립, 디지털 미디어 중독에 젊은층이 보다 취약할 개연성이 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베 정부의 부당한 수출 규제 조치에 국민은 분노했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하면서 일부 시민들은 일본 차를 긁고 일본인 여행객을 폭행했다. 조국 후보자 딸 논란 속에 ‘스카이캐슬’이 현실로 살아오자 청년들은 무너진 공정성에 분개했고, 기성세대는 우리 책임이라며 자조했다.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정의와 대의, 이념을 내세워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는 언행이 팽배하다. 편 가르기와 이분법 사고는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데는 주효할지 몰라도, 국민 정신건강에는 ‘적’이다. 계층 상승 사다리를 복원하고 공교육을 혁신하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사회적 안전망을 견고히 하고, 관용과 공감을 키우는 교육이 어릴 적부터 이뤄져야 한다. 사회가 공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생긴다는 믿음이 넓게 퍼질 때 비로소 잔혹·패륜 범죄는 잦아들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분노#울분#경쟁#경제 불황#고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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