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민간인 총기 수 100명당 120정
일상용품처럼 손쉽게 총기 구매… 총기 폭력 사망자 독일의 16배
NRA 막강한 로비에 규제법안 좌절, 시민단체들 대대적 규제 촉구 시위
지난달 말 미국 버지니아주 비엔나 카운티에 위치한 한 총포상. 상점들이 몰려있는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 2층으로 걸어 올라가 짧은 복도를 지나자 벽에 진열된 총기류 수백 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길이가 1m에 이르는 장총 수십 정이 줄지어 배치돼 있었다. 선반 위에는 자동소총들이 종류별로 올려져 있었다. 검은색 소형 권총의 판매 가격은 399달러(약 48만 원), 느낌이 좀 더 묵직한 총은 700달러가 넘었다. 엽총에는 1500∼2000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사방의 벽과 진열대를 빼곡하게 채운 총보다도 기자를 긴장시킨 건 카운터 뒤쪽에 놓인 총알들이었다. 언뜻 작은 분필상자처럼 보이는 총알 묶음은 20개짜리가 20달러에서 44달러 정도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총집과 총기 세척제 등 다른 액세서리 제품들과 함께 카운터 뒤쪽의 진열대가 모두 총알로 가득했다.
“외국인도 허가증만 있으면 총을 사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요. 총은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갖고 계신 비자 종류가 무엇인가요?”
자신의 이름을 마이크라고 소개한 총포상 주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물으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백인 남성 3명과 아시아계 청년 1명 등 손님 4명이 총기 구매 상담을 하거나 신분증을 내밀고 구매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작은 총포상은 평일 오후였는데도 계속 손님들이 들어왔다.
○ 너무나 쉬운 총기 구매 및 사용
지난달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및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이어 이달 초 텍사스주 오데사와 미들랜드에서 잇따라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인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8월 한 달간 총기 참사로 인한 사망자만 53명에 달한다. 3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앨라배마주 엘크몬트에서는 14세 소년이 가족 5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경찰에 자수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유색인종 비하 발언이 쏟아지던 시점에 불법 이민자를 겨냥해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인종주의 논란까지 불붙으면서 총기 규제는 미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개회하는 의회는 관련 논의를 다시 본격화할 예정이다.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총기 규제는 2020년 미국 대선에서도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에서 총기 규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 수백 년간 총은 미국인에게 낯선 외부인과 야생동물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보호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구글맵에서 총포상을 검색하면 집 근처에서 서너 곳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총기는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다. 총기를 포함한 무기 소유는 미국 헌법(수정헌법 2조)에도 규정돼 있는 권리다.
이런 분위기는 총기 소유의 자유를 주장하는 전미총기협회(NRA) 본사 별관에 위치한 사격연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위치한 NRA 본사 사격연습장을 회원은 시간당 15달러, 비회원은 25달러를 내고 1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다. 총과 총알은 각자 가져와야 한다.
사격 연습 중인 중년 남성 3명 외에 총기 사용법을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음시설이 돼 있는데도 공기를 찢는 듯한 실탄 발사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챈이라는 이름의 카운터 직원은 “곰이나 사슴 사냥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부터 자신의 사격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연습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라이플 3정, 피스톨 3정을 합쳐 모두 6정의 총이 있다”며 웃었다.
○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장벽들
미국은 민간인이 소지하는 총기의 수가 100명당 120.5정으로 전 세계에서 단연 1위다. 사람보다 총이 더 많다.
총기 폭력 아카이브(Gun Violence Archive)에 따르면 총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미국이 100만 명당 29.7명으로 캐나다의 6배, 독일의 16배에 달한다. 2012년 12월 총기 난사 사건으로 어린이 20명이 사망해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에도 현재까지 모두 2200건 이상 집단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NRA의 막강한 파워는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주요 장벽으로 꼽힌다. NRA는 미국의 어떤 이익단체보다도 막강한 조직과 자금력을 갖추고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NRA가 로비자금을 비롯해 한 해 쓰는 예산은 2016년 4억 달러를 넘어섰다. 미국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NRA는 2016년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선거운동에만 3000만 달러(약 342억 원)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NRA 본사 1층의 총기박물관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서 NRA 인사들과 만나 총을 선물 받는 사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NRA 인사들과 찍은 기념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NRA가 최고 권력층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총기 규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이다. 그는 엘패소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의회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정신질환자와 공격적인 비디오 게임, 소셜미디어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잇따르는 총기 난사 사건은 규제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총을 다시 사들이는 ‘바이백(buy back·재매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격용 무기로 분류되는 자동소총(AR) 같은 총기의 판매 규제는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신질환자를 포함한 위험인물이나 전과자 등의 총기 구매를 금지하고, 필요시 총기를 압수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적기법(Red flag laws)’의 의회 통과를 촉구하는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 ‘브래디 캠페인(Brady Campaign)’은 4일 미 의회 앞에서 총기 규제 관련 법안들의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중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행동을 요구하는 엄마들’이 주최한 총기 규제 캠페인도 진행됐다. 또 다른 시민단체 ‘기퍼드’는 최근 75만 달러 규모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 민주당 대선주자들, ‘총기와의 전쟁’
지난달 29일 퀴니피액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72%가 총기 폭력을 막기 위해 의회가 추가 조치를 내놔야 한다고 답했다. CNN 등 언론들은 민주당 지지자의 93%가 찬성한 것과 함께, 총기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해온 공화당 지지자의 찬성 비율도 50%에 이르는 대목에 주목했다. ‘기퍼드’ 활동가인 케이티 피터스 씨는 최근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총기 규제 강화에 나서는 것이 그저 옳다는 것 외에 정치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대선주자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총기 규제 공약을 속속 내놓고 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총기 규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며, 계속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엘패소 출신의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도 정부의 공격용 무기의 바이백 의무화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입법 추진 과정이 탄력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9월 4일로 예정됐던 총기 규제 관련 논의는 허리케인 도리안 우려 때문에 연기됐다. 의회 관계자는 WP에 “이달 말쯤 일정이 다시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NRA의 로비로 의회에 올라오는 총기 규제 법안들은 줄줄이 처리가 지연되거나 폐기되곤 했다. 그나마 과거와 좀 달라진 대목은 총기 규제 여론에도 꿈쩍 않던 월마트가 4일 공격용 권총 등 일부 총기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엘패소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했던 월마트는 미국 내 4750개 점포 가운데 약 절반에서 총기를 판매해 20%의 점유율을 보였던 곳. 한꺼번에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고 싶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더 안심하고 살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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