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이르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파도가 가득하다던가. 마음속 파도가 높아 질식할 것 같을 때, 죽음보다 삶이 자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준다고 느낄 때, 평온해 보이던 사람도 물속으로 자진해 걸어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입수(入水)가 반드시 자살의 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소설 ‘창백한 불꽃’에서 다양한 자살 이미지를 검토하며 장단점을 논한 바 있다. 관자놀이에 권총을 댄 신사, 독약을 마시는 숙녀, 욕조에서 정맥을 긋는 삼류 시인 등. 나보코프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자살 방법은 항공기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승무원이 말리지 않을까? 물에 빠지는 것은 어떤가? 나보코프에 따르면 물에 빠지는 것은 항공기로부터 추락보다 열악한 방법이다. 자칫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 다가서긴 하되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물에 빠지는 일은 갱생의 상징으로 적합하다. 실로 물을 갱생의 상징으로 활용한 사례는 여러 문화권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구약의 출애굽기에는 파라오의 탄압을 피해 물에 떠내려 온 어린 모세가 갱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한 물과 갱생의 이야기는 기원전 24∼23세기 수메르 도시 국가들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진 ‘아카드의 사르곤’의 출생 신화에까지 소급된다. 갱생 이미지로의 물은 ‘심청전’을 접해온 한국의 독자에게도 익숙하다. 심청은 인당수(印塘水)에 빠진 뒤,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현대의 비디오 아티스트 중에서 이러한 물의 이미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빌 비올라다. 어렸을 때 실제 익사할 뻔했던 비올라는 ‘교차’(The Crossing·1996년),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2014년), ‘물 순교자’(Water Martyr·2014년) 등 여러 작품에서 물을 갱생의 상징으로 도입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왠지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하고, 그는 조만간 물의 세례를 겪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딘가 다른 단계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자신마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올여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들 중 단연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보희와 녹양’은 한 사내가 평상복을 입은 채로 입수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옷만 물에 잠기는 빨래나 평상복을 벗고 하는 수영과는 다르다. 평상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일상의 삶을 통째로 물에 집어넣는 일이다. 그것은 우는 것이 금지된 다 큰 어른이 크게 우는 방식이다. 어른은 아이와 달라 비상벨처럼 울어댈 수는 없으므로, 눈물을 보다 큰물로 가릴 수 있는 강이나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나보코프가 말한 대로 물에 빠진다고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므로, 그리고 물에 빠지는 일은 때로 갱생의 의미를 띠므로,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에 빠진 이 사내는 과연 죽을 것인가, 아니면 갱생할 것인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대답하는 과정에서 보희와 녹양은 성(性) 정체성을 재고하고(그 점에서 ‘꿈의 제인’(2016년)을 잇고), 가족의 재구성을 고민하고(그 점에서 ‘가족의 탄생’(2006년)을 잇고), 성장의 의미에 대해 묻고(그 점에서 ‘어른도감’(2018년)을 잇고), 급기야 예술이 갖는 의미를 환기한다.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녹양에게 보희가 묻는다. 그걸 뭐에다 쓰려고? 녹양이 대답한다, 그냥. 그러나 “그냥” 만드는 예술이 때로 인간을 구원한다. 보희와 녹양이 2019년 여름밤 나를 잠시 구원했던 것처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