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영화나 한 편 보다 잘까 했다. 그런데 TV 리모컨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채널을 바꿀 수도, 음량을 조절할 수도 없었다. 화면을 송출하는 셋톱박스에는 전원 버튼밖에 없었다. TV는 오로지 리모컨으로만 통제할 수 있었고, 하필 음소거 상태였다. 마침 화면 속 홈쇼핑 호스트들이 과장된 제스처로 에어프라이어를 팔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평소 같으면 망설임 없이 채널을 돌렸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부터 불길한 낌새를 보이긴 했다. 리모컨의 숫자 버튼이 하나씩 맛이 가더니 나머지 버튼도 아예 먹통이 됐다. 그렇다고 서비스센터와의 전화 상담이 가능한 이튿날 오전 9시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화면 속 에어프라이어가 얼마나 놀라운 성능의 조리 도구인지 지금 당장 알고 싶었다. 이성을 가다듬고 눈앞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비록 졸업은 못했지만 나는 한때 제어계측 공학도였다. 리모컨쯤이야 옛 기억을 더듬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부터 시도했다. 실리콘 재질의 버튼과 버튼 아래 회로판 사이에 먼지 같은 이물질이 잔뜩 쌓였거나 명령을 인식하는 부품이 떨어져 나갔을 거야. 자, 이제 회로판을 플라스틱 재질의 리모컨 껍데기로부터 분리만 하면 될 텐데, 어? 이거 어떻게 분리하지? 억지로 분리하다가 결국 리모컨을 통째로 박살내고 말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혹시나 해서 박살난 리모컨을 대체할 만한 방법이 있는지 검색했다. 과연 있었다. 스마트폰에 리모컨 앱을 설치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다. 곧바로 리모컨 앱을 내려받아 실행했다. TV와 리모컨 앱을 연결하려면 TV에 여섯 자리의 인증번호를 입력해야만 했다. 인증번호는 박살난 리모컨으로만 입력할 수 있었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나마 회로판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회로판에 건전지를 연결하고 이쑤시개로 숫자 버튼에 해당되는 단자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섬세한 터치가 아니면 숫자가 입력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다섯 자리까지 입력하고 마지막 숫자에서 버벅거리다가 초기 화면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진땀을 뻘뻘 흘린 끝에 인증번호 입력에 성공했고, 드디어 에어프라이어가 얼마나 놀라운 성능의 조리 도구인지 알게 됐다. 유레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거머쥔 골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사정 기관의 일원이 이런 기분일까. 마침내 스마트폰으로 TV를 통제할 수 있게 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아내와 아이가 가만히 누워서 “TV 좀 틀어 봐”라고 하면, 나는 긴급한 볼일로 화장실을 가다가도 TV부터 틀어야 한다. “다른 데 좀 틀어 봐”라고 하면, 거래처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도 TV 채널부터 바꿔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 번인가 불려 나갔다. 게다가 채널 선택권은 아내와 아이가 독점하고 있고, 내가 보고 싶은 채널로 바꾸려면 허락을 구해야 한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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