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알고도 감독 맡긴 축구협회[현장에서/이원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1일 03시 00분


최인철 감독 사퇴와 관련해 10일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 뉴시스
최인철 감독 사퇴와 관련해 10일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 뉴시스
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되는 시대인데, 최근 도덕이나 인권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점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된 뒤 과거의 폭행 논란이 불거지자 엿새 만인 9일 최인철 감독(현대제철)이 자진 사퇴한 것을 놓고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이 10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한 말이다.

최 감독은 선임되기 전 협회 관계자들과 면접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2011년 지도하던 선수를 다그치면서 파일(서류철)로 머리를 가볍게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그 사건으로 많이 배웠고 성숙했다”는 발언을 했고, 협회는 감독직을 내줬다.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니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령탑 후보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최 감독의 과거 행동에 대해 여러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라커룸에서 머리를 때리거나 폭언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훨씬 오래전에 학교 팀을 맡았을 때도 폭행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김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새 사령탑을 뽑기에 앞서 선수들의 얘기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최 감독이 선수들을 무척 엄하게 대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다른 후보에 비해 최 감독의 역량이 워낙 월등해 뽑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무척 엄하다’는 식으로 표현은 순화했지만 사실상 최 감독의 폭행 사실을 알고도 임명했다는 의미다. 간담회장에서는 “최 감독을 국가대표 사령탑에 앉힐 게 아니라 (징계를 논의하는) 공정위원회에 출석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최근 폭력이나 성폭력 등으로 지도자에서 물러난 체육인은 한둘이 아니다. 올해 초에는 국가대표선수촌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한 인사가 2000년대 초반 지도자 시절에 선수를 때렸다는 것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자축구계만 해도 과거의 성폭행 사건이 드러나 올해 초 퇴출된 지도자가 있었다. 이런 ‘선행 학습’ 기회가 있었는데도 협회는 “반성하고 있다”는 당사자의 말만 듣고 덜컥 선임을 발표했다가 다시 새 감독을 찾아야 되는 상황을 자초했다.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된 여자축구연맹 관계자의 발언은 귀를 의심하게 한다. 매스컴을 통해 최 감독의 폭행 사실을 알게 됐다는 그는 “과거의 잘못을 들춰서 책임을 묻는 것이 아쉽다. 현재만 잘하면 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축구계가 전반적으로 폭력에 대해 무감각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최근 도덕이나 인권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졌다”고 했지만 폭력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아왔다. 협회는 바뀐 사회 분위기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당장의 성적,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해 폭력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원주 스포츠부 기자 takeoff@donga.com
#축구협회#최인철 감독 사퇴#여자축구 국가대표팀#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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