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정부가 한창 소득주도성장의 기치를 올릴 때다. 김광두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각종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경기 침체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보여진다”고 말하면서 정책효과와 경기 논쟁에 불이 붙었다. 청와대와 여당에서는 “J노믹스 설계자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부글부글 끓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도 “한 달 치 통계만 갖고 보기는 어렵다. 광공업생산 빼고 다른 쪽은 나쁜 흐름을 보이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사후적 통계가 아니라 피부로 먼저 느끼던 기업인들은 무슨 뒷북치는 소리냐고 했다.
그해 말 김광두 부의장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김 부의장이 맞았다. 지금은 누구도 우리 경제가 당시부터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인구구조 탓이다” “기다리면 효과가 날 것이다”고 했다가 지금은 미중 무역 갈등이나 일본의 경제 보복 같은 외부환경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전 팀과 달리 억지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맞다.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전망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랏빚을 내서라도 살려야겠다, 국회가 도와달라는 전략이다.
최근 한국 경제에 과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디플레이션이란 말이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한 달 치 통계이기는 하지만 8월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디플레이션에 대한 판단과 전망이 엇갈린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수요 둔화로 물가 수준이 장기간에 걸쳐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농수축산물과 석유 가격 하락 등 공급 측면에서의 일시적 요인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책임 있는 당국자의 발언은 자기 예언적 실현을 넘어 시장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뒤가 찜찜한 것은 역시 외환위기 이후 이어져 온 정책 책임자들의 발언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반면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도 적지 않게 작용했기 때문에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같은 장기불황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섰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괜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최근 나오는 경제지표가 잿빛 일색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기본 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잘해야 2%대 초반이고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수출이 지난해 12월 이후 9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무역흑자는 3분의 1 토막이 났다. 엊그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한국의 주력 기업들에 대한 신용등급이 무더기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올 것이 오나 싶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미국 중국을 포함해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할 것이라는 ‘R(Recession·침체)의 공포’가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 갈지 모른다는 ‘D(Deflation·저물가 장기불황)의 공포’가 어른거리고 있다. 정치가 경제에 부담을 주는 ‘P(Politics·정치)의 공포’까지 겹쳤다.
1933년 대공황의 한가운데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단 한 가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다”라고 했다. 실제 이상으로 위기를 조장하고, 공포감을 키우는 것은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무엇보다 정부와 기업, 국민 간의 신뢰가 중요한 때다. 그러려면 정부가 지금보다 더 솔직해져야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성과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공포는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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