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26일 묘향산. 당시 ‘일본 정계의 우두머리’라 불렸던 가네마루 신(金丸信·1914∼1996)을 환대하는 김일성의 첫인사는 이랬다고 한다. 초당파 방북단을 이끌고 간 가네마루는 이 회담 뒤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조선노동당 3당의 이름으로 ‘북-일 수교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 나포돼 7년간 억류돼 있던 후지산마루호 선장과 기관장을 귀국시키는 등 가시적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선언은 귀국 뒤 ‘굴욕 외교’, ‘매국 외교’라고 지탄받았다.
▷당시 김일성-가네마루 회담은 밀실에서 진행됐다.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보상 문제가 논의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내용은 문서화되지 않았고 내내 논란의 씨앗이 됐다. 이후 북한이 시도 때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난할 때마다 일본 측은 이것이 밀실 협상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당시 북-일 국교 정상화와 식민지 시대 및 전후 보상을 북한에 약속했던 가네마루는 ‘전후 보상’이 문제가 되자 “국교 정상화가 늦어진 데 따른 이자분”을 주장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 1996년 가네마루의 죽음으로 공동선언은 빛이 바랬지만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방북과 북-일 평양선언의 기초가 됐다.
▷그로부터 다시 17년. 오랜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 일본이 움직이는 걸까. 비서로서 이 방북단을 수행했던 가네마루 신의 차남 가네마루 신고(金丸信吾·74) 씨가 14일 60여 명을 이끌고 평양에 갔다. 부친의 탄생 105주년 기념식을 17일 현지에서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출발 직전 “아베 총리의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론을 저쪽(북한)에서 받아들일 생각인지 듣고 싶다”며 기대를 다지기도 했다. 이달 말부터는 일본의사회가 북한에 의료지원대표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하니 북-일 간 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분위기는 확실한 것 같다.
▷가네마루 신은 ‘의리와 인정’의 정치를 내세웠다. 대놓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싫어했지만 나카소네는 가네마루의 ‘그릇의 크기’를 인정해 자민당 부총재로 모셨다고 하니, 누구의 그릇이 더 큰지는 좀 따져봐야 할 듯하다. 총리가 될 수 있었지만 고사한 인물로도 꼽힌다. “총리가 돼 고생하는 것보다 총리를 뒤에서 조종하는 게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다. 1992년 터진 ‘사가와 규빈’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및 탈세로 말년은 체포와 재판으로 얼룩졌다. 자택을 압수수색하니 금괴가 잔뜩 나와 “김일성에게서 받은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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