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차 동티베트에 다녀왔다. 일정 중 며칠을 초원에 머물기도 했으니, 간쯔 허허벌판에 세워진 낡은 수도원에서 숙식을 해결한 덕분이다. 잠자리는 가히 극기훈련이라 할 수준. 다만 음식은 썩 훌륭했다. 20년 넘게 홀로 수도원을 운영한 노승은 직접 키운 작물 몇 가지로 뚝딱 별미를 부렸다. 한 번의 예외, ‘참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티베트 전역에서 아침 식사로 먹는 이 음식은 보리, 밀, 콩 등의 곡류를 곱게 빻고 볶은 것으로 보통 버터차를 살짝 가미해 뭉쳐 먹는다.
고백하건대 ‘뭐든 잘 먹는다’는 둥 ‘스님이 평소 먹는 걸 먹겠다’는 둥 호기를 부렸던 나는 그날 분투를 벌여야 했다. 찰흙이 연상되는 식감에 씹을수록 침이 말라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식사를 반절이나 남겼고 그동안 스님은 대접 하나를 싹싹 비웠다. 문자 그대로 접시까지 핥아서.
이 음식을 접할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리탕의 장례터에서였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에서는 시체가 잘 부패하지 않아 고인의 시신을 새에게 먹이는 천장(天葬) 문화가 발달했는데, 당도해 보니 독수리들이 배를 채우는 동안 유족들은 언덕 아래에서 모닥불에 뭔가를 데우고 있었다. 참파였다. 평생 먹어온 음식의 냄새를 피워 하늘로 오르는 영의 안식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티베트에는 명복을 뜻하는 표현도 없지만 아무튼 언젠가부터 그런 의례가 자리 잡았다고 했다. 고인의 아들이 손을 녹이며 설명한 바에 따르면 말이다.
나는 문득 경상도 향토 음식인 김치국밥을 떠올렸다. 나의 양친이 일평생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일 것이므로. 김치와 밥을 뭉근하게 끓여 내는 이 요리는 남는 반찬으로 만드는 경북의 국밥 ‘갱시기(갱죽)’에서 유래했는데, 내륙 지방도 부산처럼 멸치 육수를 근간으로 삼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특히 몸이 안 좋을 때 김치국밥을 찾았다. 한국의 국 중에선 유독 포타주(프랑스어로 ‘되직한 수프’)인 특성 때문일까? 어머니 말마따나 멸치국물과 김치 익는 냄새가 한국인에게 끼치는 마력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유년기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고. 참파처럼 타지 사람에겐 곤혹스러운 음식일 확률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음식이 사멸의 처지에 놓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김치국밥을 다루는 식당은 전무한 수준이고, 경상도 토박이라도 나이가 어리면 그 정체조차 모르기 일쑤다. 이런 홀대에는 가난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한몫했을 것이다. 먹거리의 양을 불리려, 또는 부족한 찬거리를 무마하려 발달한 요리는 교류의 장에 나오지 못한 채 각 집마다의 레시피를 만들어냈고, 이제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에 맞춰 음식이 사라지고 등장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 다만 나는 동티베트에서 돌아오는 새벽 비행기 안에서 여행 수첩에 이렇게 썼다. ‘고급한 문화만을 기록하고 향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난해질 것이다. 때로 미감 너머의 취향이 우리가 누구인지 더 잘 말해주므로.’ 경미한 감기 탓인지, 허줄한 담요 속에서 졸다 깼을 때 문득 또 김치국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는 직접 김치국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비록 뭔가 빠진 듯한 맛이 나긴 했지만. 레시피를 전화기 너머로 배운 탓일까? 다행히 그 맛에는, ‘손에 익으며 점차 나아지리라’는 모종의 예감도 서려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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