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어디선가 수백 마리의 벌들이 날아와 우리 집 빈 벌통에 살기 시작했을 때 웬 굴러온 호박인가 싶어 좋아했다. 이제 맛있는 꿀을 잔뜩 먹게 됐구나! 그런데 그냥 김칫국물을 먼저 마신 격이었다. 사람들은 “벌을 키운다”고 말한다. 개나 고양이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병원도 데리고 다니며 보살펴주니 인간이 키우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은 키운다기보다 스스로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는 독립된 존재였다.
그들 대가족이 우리 집 커다란 이팝나무 아래 벌통으로 이사 온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올여름 날씨가 좋지 않았다. 긴 장마로 꽃들은 비에 젖어 꿀들이 다 흘러버렸다. 꿀을 따서 저축해야 하는 황금기에 완전히 공쳤다. 현장 노동자들이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며 은행 잔액을 축내듯 장마 동안 벌들은 벌집 속 꿀을 야금야금 비워 버렸다. 레돔은 멈추지 않는 비를 원망하며 젖어서 떨어지는 꽃잎을 다시 살아나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일기예보를 들으면서 물 많은 한국의 여름 날씨를 원망했다. 일본 남쪽 해상에 머물다가 사라지지 않고 북상하는 장마전선에 욕을 퍼부어대며 북태평양 고기압 세력의 강도와 국지성 호우의 길목을 예의 주시했다. 어느덧 여름 장마가 끝나니 굼실굼실 어린 벌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왕벌은 알을 부화했고 벌들은 부지런히 화분을 뭉쳐서 들락거렸다. 벌들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삶의 위험은 곧바로 닥쳤다. 바로 먹잇감을 찾는 말벌이었다. 말벌도 새끼를 낳았고 그들은 꿀벌의 몸통을 먹으며 단백질을 보충했다. 매일 서너 마리의 말벌들이 벌통 주변을 빙빙 돌다가 무차별 공격을 해왔다.
“가만두지 않겠어!” 레돔은 미친 듯 화를 내며 잠자리채를 휘둘러 말벌을 때려눕혔다. 내리는 비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지만 말벌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 소탕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말벌이 나타나면 벌들은 주춤하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여왕벌은 새끼를 부화하지 않았다. 전쟁이 선포되고 모두가 말벌에 대항해 집을 지키지만 피해가 컸다. 그러나 9월이 되면서 말벌의 공격도 끝이 났다. 말벌 새끼들이 다 자라서 더 이상 먹잇감을 날라다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 맑다니, 꿀벌들아 이제 마음껏 꿀을 따오렴!”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날씨는 좋은데 꽃이 없다. 배고픈 벌들이 여기저기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작년엔 동네 앞 언덕에 개망초 꽃이 많이 피어 있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근처 들깨 밭에 들깨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벌들이 윙윙거리며 하얀 꽃 속에 들어가 꿀을 빠는 모습은 참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오래가지 못한다. 꿀벌은 열심히 일하지만 예민하고 나약한 존재다. 특히 농약에는 치명적이다.
양껏 꿀을 실어오던 벌들이 벌통 아래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죽어가는 것을 볼 때는 정말 긴장된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의사도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잘못 먹고 왔는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머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죽는 것을 보니 뇌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약을 삼킨 것 같다. 어디선가 농약을 쳤나 보다. 해충이 죽지 않으니 농약은 점점 독해진다. 독한 약에 해충도 죽고 벌도 죽는다. 벌이 다 죽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벌들이 꿀을 빠는 동안은 그래도 땅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건만 생존이 점점 불안해져만 간다.
한나절 끙끙 앓으며 몸을 비틀더니 살아남은 벌들이 집 정비를 시작했다. 벌통 안의 죽은 제 식구들을 모두 밖으로 끌어내 버리는 작업을 한다. 얇은 날개로 입구를 싹싹 닦아 청소도 한다. 현명하고 굳센 놈들, 다시 시작하는 벌들이 참 기특하다. 꽃이 별로 없는 가을,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벌들의 말을 대신 전하려고 한다. “꽃이 없어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요. 제발 독약만은 좀 덜 뿌려 주세요. 당신들이 딛고 선 땅을 귀하게 보살펴 주세요. 그러면 달콤한 꿀로 꼭 보답할게요!”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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