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인근에 위치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46)의 자택을 찾았다. 마침 그의 아들 세준(윌리엄·4)과 딸 세희(캐럴라인·3)가 유치원을 다녀왔다. 두 아이는 “손님에게 인사하세요”라는 아버지의 한국말에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2주 전부터 한국어 수업도 듣고 있다는 세준이의 유치원 가방에는 큰 글씨로 ‘Sejun’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리퍼트 전 대사는 2014년 1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한국에 근무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놓지 않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집안 곳곳에는 안동소주 호리병, 포돌이 인형, 액자 등 한국을 상징하는 물건이 가득했다. 그와 가족의 일상에서 한국은 떨어질 수 없는 부분인 듯했다. 》
리퍼트 전 대사가 인터뷰에 응한 13일은 청와대가 유엔총회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계획을 밝힌 직후였다. 그는 “한미 간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하고 많은 협의가 필요하다. 뉴욕에서의 정상회담이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한일 갈등 해결을 위한 미국의 촉진자 역할 등에 대해서는 ‘스마트한 원칙 외교(smart principle diplomacy)’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 등으로 한미 관계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떤 동맹이든 관계의 부침(ups and downs)이 있다. 진정한 동맹의 가치는 모든 상황이 좋을 때가 아니라 긴장과 압박 요인이 있을 때 더 잘 드러난다. 한미 양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긴밀하게 협의를 지속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가 뭔지 이해해야 한다. 핵심 사안에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현명하다.”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곧 시작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5배 증액’ 요구가 한미 관계를 흔들고 반미 감정을 키우는 뇌관이 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한국은 지금까지 매우 큰 기여를 해왔다. 지역 내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매우 강력한 기여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남성이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하고, 100억 달러(약 12조 원)가 들어간 미군의 해외 최대 군 기지를 갖고 있으며, 지난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는 부담률을 더 높였다. 한국의 국방비는 최근 5, 6년간 계속 증가했다. 이런 기록을 보라. 한국이 한미 동맹에서 훌륭한 기여자라는 것을 입증할 강력한 데이터들과 긴 목록이 있지 않은가. 중요한 점은 방위비 협상이 몇 달러, 몇 센트 같은 수치상의 기여 문제가 아니라 (동맹의) 토대를 닦는 문제라는 점이다. 동맹국이 서로 바위처럼 단단한 토대 위에서 공동의 목표와 이해관계에 대해 협력하고 있다는 확신의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의 가치를 별로 중시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했는데….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미 의회가 동맹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회는 최근 주한미군의 감축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내놨다. 미국 내 전문가 그룹과 여론도 한미 동맹을 지지하는 강력한 토대가 된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은 동맹에 있어 강력한 기여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도 유명한 리퍼트 전 대사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했다. 평가를 내리는 데 신중했고 표현도 매우 절제돼 있었다. 그 대신 그는 현 정책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수치나 근거들을 차근차근 제시했다. 동맹의 가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역설할 때에는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근간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완전한 돈 낭비’라고 말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 훈련의 완전한 중단을 요구해 관철시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이미 1990년대에 팀스피릿 훈련을 취소한 적이 있다. 최근에도 일련의 훈련 규모를 축소하거나 취소했다. 그러나 북측으로부터 이에 대한 어떤 상응조치를 받지 못했다. 연합 군사훈련 중단이 비핵화 협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미군의 준비 태세가 정치적 협상의 카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시점에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려 하고 있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대사로 있을 때 한미 관계는 탄탄했다. 상호 신뢰가 깊었다. 2015년 비무장지대(DMZ) 포격전 등에 관해 남북 협상이 진행 중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는 협상장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을 깊이 신뢰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맹 관계는 매우 중요하며, 더 강할수록 더 깊은 신뢰가 형성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곧 뉴욕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들었다. 한미 관계에 긍정적인 사안이다. 다만 양국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또 북한을 향해서도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을 ‘동북아의 가장 중요한 두 동맹’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막상 한일 분쟁은 방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대통령의 관여 의지가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일본 모두 미 대통령의 관여 의지를 확인한다면 그것이 상황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집권 2기 후반부에 2, 3차례 한미일 3자 정상회의를 열었다. 만약 미 대통령이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면 한일 양국 지도자의 근본적 계산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상황을 개선할 여지를 줄 수는 있다. 이 여지는 때로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을 듣고 놀랐는가.
“놀라지 않았다. 상황이 이미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다만 지소미아가 실제 종료되는 올해 11월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 이 문제에는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만큼 상황을 진전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마트한 원칙 외교(smart principle diplomacy)’가 필요하다.”
―주한 미국대사 재직 당시 껄끄러웠던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이에서 막후 중재도 활발히 했던 것으로 안다. 현 상황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미국이 중재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미국이 서울과 도쿄에 ‘잘 지내라’고 말하면 양국이 잘 지낼 것이란 오해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한일 두 나라의 복잡하고 중요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역사 문제를 간과하는 태도다. 또한 한국과 일본 모두 각자의 리더십, 이해관계,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보유한 강한 국가임을 간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때때로 서로의 오해를 풀도록 돕고 촉진하는 것이다. 미국의 역할은 작지만 그 작은 역할이 두 나라의 간극을 좁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막후에서 보이지 않게, 때로 사적 채널을 통해 조용히 양국 관계를 조율해온 긴 역사가 있다.”
1시간의 인터뷰 내내 그의 눈매는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었고 어조는 단호했다. 종종 한국 방송에 출연해 한국 음식을 요리하고, 한국 여러 야구장에서 열정적으로 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연예인 같은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한미 동맹과 한반도 정세에 대한 무거운 기류를 반영하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서울 출장이 어땠느냐”고 질문하자 예의 친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업무가 끝난 뒤 짬을 내 서울 잠실야구장, 대전 한밭야구장 등에서 야구 경기를 여러 차례 관람했다. 다만 대구에서 열린 ‘치맥 페스티벌’을 못 간 것이 너무 아쉽다”며 웃었다. 영어가 아닌 유창한 한국말로 대사 시절 자주 찾았던 서울 광화문의 한 순두부집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에게선 ‘한국 아재’의 모습이 느껴졌다.
○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 약력
△ 1973년생 △ 스탠퍼드대 국제정치학 석사 △ 2005∼2008년 버락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 수석대외정책보좌관 △ 2009년 미 국가안보회의(NSC) 비서실장 겸 대통령부보좌관 △ 2012∼2014년 미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 △ 2014년 10월∼2017년 1월 주한 미국대사 △ (현)미국 보잉사 부사장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