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경주, 작은 사치[2030 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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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원스토어 웹소설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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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하늘에서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23일이 절기상 추분(秋分)이었다. 가을의 본격적인 시작인 백로(白露)와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寒露) 사이, 비로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땅거미가 내려앉은 퇴근길 풍경 앞에서 새삼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한다.

가을이 왔다. 경주에 갈 때가 된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경주를 찾는다. 함께도 좋지만 대체로 홀로 가는 편을 선호하는 이유는, 동행보다는 여행에 온전히 마음을 쏟고 싶기 때문이다. 울긋불긋 단풍이 진 토함산 자락을 따라 불국사를 찾는다. 점심은 하산길 청국장에 막걸리면 더할 나위 없다. 여유가 된다면 문무대왕릉에 들러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모난 마음을 깎아낸다. 그리고 이튿날, 상쾌한 가을 아침의 공기를 맡으며 커피 한 잔을 들고 왕릉 가를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가을 경주 전통의 시작은 어언 10년 전, 내 생애 첫 홀로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낯간지러운 이유로 상처를 받은 유약한 청춘은 배낭 하나를 메고 경주로 떠밀려왔다. 낯선 거리를 걸으며 낯선 이들과 미소를 주고받다 보면 마음이 절로 누그러졌다. 해묵은 고민들이 조금은 씻겨 나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날 선 감정으로 상처를 받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착해지고자, 흘려보내고자 마음먹을 때 내게는 이곳이 필요했다.

아마 방법은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런 ‘비법’이 있으리라. 다친 마음을 치유하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 혹자에게는 늘어지게 자는 낮잠일 수도, 가벼운 산책일 수도, 친구들과의 거나한 술자리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좋겠지만 행여 아직 그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경우라면 단연코 여행은 그 지름길이다. 그리고 청명한 하늘과 산뜻한 공기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을은, 두말할 것도 없는 여행의 적기이다.

여행 일정을 고르던 중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내일로’ 이용연령이 만 27세에서 만 34세로 확대된다고. 내일로는 청년들이 패스 한 장으로 일정 기간 열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한국철도공사의 상품이다. 특성상 여름, 겨울방학 때에만 제공되는 점이 아쉽지만 자소서에 묻혀 20대를 보낸 청춘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평균 취업 연령과 초혼 연령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이 시점에 기존 27세라는 청년의 기준은 아무래도 가혹했다.

아무리 바쁘고 아파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스스로에게 쉼의 기회를 부여하는 일만큼은 소홀해지고 싶지 않다. 대단한 계획도 마음 맞는 동행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한 해 동안 여지없이 고생한 스스로에게 그저 약간의 여유를 허락하는 일. 올가을, 거창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낯선 거리를 훌훌 걷는 작은 사치를 누려봄은 어떨지.
 
김지영 원스토어 웹소설 PD
#가을#추분#내일로#가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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