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자유한국당 분위기가 좋아졌다. 8월 중반만 해도 지지율은 정체되고 장외집회 동력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당 지도부는 “집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떤 주제를 잡아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 의혹이 커지면서 큰 고민이 사라졌다.
황교안 대표가 ‘반(反)조국연대’ 기치를 내걸고 삭발까지 하니 지지율이 2∼3%포인트 올랐다. 삭발하는 황 대표 얼굴에 수염이 그려지고, 오토바이에 올라탄 패러디 사진이 온라인에서 나돌자 당 지도부는 환호했다. 면바지를 입고 ‘스티브 잡스식’ 경제비전 발표도 하니 대안정당 이미지도 갖추는 듯하다. 검찰 수사가 가속화되자 의원들은 “이제 검찰이 뉴스를 계속 만들어 줄 테니 지켜보면 된다”고도 했다. 조 장관 덕에 총선 승리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내부적으로는 “조국이 큰일을 했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조국 사태가 길어지면서 심상찮은 조짐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총선을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멈춰 섰고 ‘포스트 조국’ 구상은 안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각종 투쟁 과정에 참여한 정치적 대가를 요구하는 청구서만 당 안팎에서 남발되고 있다. 당을 위해 희생했으니 내년 총선 공천 등 보상을 달라는 주장이다.
황 대표 삭발 이후 초선 의원들은 서로 전화를 돌려가며 “조만간 검찰 수사에서 결정적인 게 나온다고 한다. 지금이 삭발할 마지막 타이밍”이라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삭발 공천’의 마지막 티켓을 끊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더니 이젠 ‘삭발 자제령’이 내려져 10명 선에서 삭발이 멈췄다. 윤석열 검찰총장 손에 ‘패스트트랙 사건’이 들어가면서 야권의 공포감이 커지다 보니 “당을 위해 패스트트랙 투쟁에 나섰다”는 말이 자주 들리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황 대표가 ‘패스트트랙 사건’으로 고발당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공천을 주겠다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고발은 훈장’이라고 강조했다”고 하는 의원도 많다. 단식농성장에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황 대표의 격려가 쏟아진다.
지금 한국당은 조국 사태에 취해서인지 1년 전 상황을 깡그리 잊은 듯하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뒤 한국당에선 인적쇄신론도 모자라 ‘당 해체론’까지 나왔다. “친박(친박근혜) 비박(비박근혜) 갈등 때문에 국민이 당을 버렸다”는 이유에서다. 물갈이 요구에 김병준 비대위가 현역 의원 21명을 당협위원장에서 잘라낸 게 불과 9개월 전이다.
더 큰 문제는 총선 승리를 위한 지상 과제로 제시됐던 보수통합과 인재영입 프로세스도 사실상 동결됐다는 점이다. 인재영입위원회가 영입 대상 20여 명 명단을 만들어 본인 의사까지 확인한 지 두 달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명단을 발표하지도 못했다. 8월 위기 상황 땐 황 대표가 “나를 내려놓겠다”고 했던 통합 이슈도 쏙 들어갔다. 바른미래당의 안철수 유승민 전 대표 측은 “황 대표의 연락을 받은 적 없다”고 했다. 민주당에서 불출마론이 불붙자 그제야 총선 준비 회의 열고 당무감사 일정을 확정했다. ‘조국 이슈’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찌할까 싶을 정도다.
2016년 20대 총선 직전 상황을 돌아보면, 여야는 뒤바뀌었지만 상황은 묘하게 비슷하다.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 등 분열 위기 속에서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물갈이와 인재영입에 주력했다. 2015년 겨울부터 “표창원 이철희 조응천 영입” 등 뉴스가 쏟아졌다. 급기야 문 대표는 영입인사인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당권도 넘겼다. 총선 결과 민주당은 1당이 됐고, 여당인 새누리당은 야권 분열의 반사이익만 기대하다 진박 감별 논란에 빠져 패배했다. 제1야당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조국 사태에만 기댄다면, 조국 사태는 언제라도 한국당에 독(毒)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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