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대한민국, 한국 이름 유동룡(庾東龍). 하지만 일상의 생활은 일본에 있었던 건축가 이타미 준. 한국과 일본 그 어느 쪽에서도 늘 이방인이라는 시선을 받아온 고독한 건축가. 나의 아버지.’
자신의 이름보다 이타미 공항의 이타미와 한국 음악가 길옥윤의 윤(일본식 발음 준)을 합해 만든 예명 이타미 준(伊丹潤)으로 더 유명한 세계적인 건축가 유동룡, 그를 아버지로 둔 유이화 건축가의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산문집 ‘손의 흔적’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말이다.
재일교포로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지만, 역설적으로 이방인으로서의 실존이 이타미 준의 건축과 예술의 원천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실존적 삶이었다. 그가 소통에 특별히 주목하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는 어디에 건축물을 세우든 ‘풍토, 경치, 지역의 문맥’을 중요시했다. 건축은 본질상 자연을 침해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물감을 없애고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했다.
그가 세운 제주도의 방주교회도 관계와 소통이 핵심 주제였다. 건축물이 물, 바람, 돌, 나무, 빛, 하늘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안에 들어가서도 불투명한 벽으로 스스로를 차단하지 않고, 나무와 유리의 반복적인 배열을 통해 빛과 세상이 ‘물을 건너’ 들어오게 한 것은 소통에의 의지였다. 자세히 보아야 드러나는 십자가를 몸체에 붙이고, 미리 말해주지 않으면 교회 건물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없게 만든 것도 자신을 낮추고 소통을 중시한 결과였다. 노아의 방주를 모티프로 한 건물은 자연 앞에 자신을 낮춘 결과물이었다. 겸손한 낮춤의 건축미학.
그래서인지 이타미 준이 서귀포시 안덕면 언덕에 띄운 방주는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사람들에게 자신의 품을 기꺼이 내어줄 것만 같다. 그들이 이제라도 상처와 고통과 울음을 극복하고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정말이지 이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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