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전기의 특징을 배웠다. 눈으로 볼 수 없다,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저장이 안 된다, 이 세 가지였는데 요즘은 전기가 저장된다. 과학의 법칙이 바뀌었다!”
최근 만난 기업인은 에너지기술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업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요즘 에너지 분야에서는 급속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전문가 토니 세바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조만간 태양광과 풍력으로 인해 석유와 원자력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전기의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면서 거대 전력회사들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그의 예측이 다 맞지는 않겠지만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이미 여러 나라에서 태양광 전력의 가격은 석탄이나 천연가스 발전(發電)보다 싸졌다. 청동기가 나오면서 석기시대가 종말을 고했듯이 100년이 넘은 석유산업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새로운 주인공은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다. 기후 이변으로 인한 지구 환경에 대한 걱정이 에너지 전환을 더 촉진하고 있다.
구글 애플 BMW 이케아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사용하는 전기의 전부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고 있다. 애플과 이케아 같은 기업들은 이미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했다. 이 ‘RE100(Renewable Energy 100)’은 기업들의 자발적인 캠페인이지만 이미 각 나라의 경제와 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불과 5년 만에 영향력이 큰 기업 200개로 확산됐고 이들이 협력업체들에도 동참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은 반도체를 공급하는 삼성전자 등에, BMW와 폭스바겐은 배터리를 공급하는 LG화학 등 부품업체들에 재생에너지만 사용해 제품을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석탄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이용해 제조한 제품에 대해서는 탄소세 같은 세금을 부과할 태세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이런 메가트렌드에 빨리 대비하지 않으면 경제에 타격을 받을 것이다. 재생에너지는 화력발전이나 원전 이상으로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낸다.
한국 정부도 4월 발표한 ‘에너지 기본계획’에서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30∼35%로 늘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이란 말만 하면 ‘탈원전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아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 같지가 않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들은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내놓을 생각은 않고 오로지 ‘탈원전 철회’만 외치고 있으니 답답하다. 현재 7, 8%에 불과한 재생에너지를 30%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면 할 일이 많다.
환경을 중시하는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로 시작한 RE100은 최근 중국 일본 인도의 기업들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만 1개도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해외 사업장에서는 ‘재생에너지 100%’를 선언했지만 국내에서는 여건 부족으로 진전을 못 보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국내에서도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전력을 살 수 있도록 ‘녹색요금제’를 만들어 이달부터 시범사업을 한다. 그러나 정부가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여건을 마련하는 데 이렇게 굼뜨게 움직여서야 세계적 흐름을 쫓아가기 어렵다.
에너지정책은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밑그림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천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기존 산업과 새로운 산업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기 때문에 명확한 비전을 갖고 조율해 나갈 사람이 필요한데 지금 정부 안에는 그런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자칫 우왕좌왕하다가 국제사회로부터 ‘기후 악당’이라는 비난을 자초하고, 새로운 기술과 일자리는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길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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